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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나다 Jun 14. 2024

슬기롭지 않은 병원생활

5살 꼬마의 병원사람들



그냥 다리를 다친 것만 인지하고 있지 어디 부위까지 어떻게 절단되었고 다시 재수술을 하는 정확한 과정은 5살의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왼쪽 발가락들은 골절되어 여러 핀으로 고정해 붕대를 감고 있었고, 오른쪽 발 끝은 누가 봐도 잃은 것이 확연하게 동그란 모양이었다. 두껍고 두껍게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아팠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사고 났을 때 절단 부위가 좋지 않았고 수술했을 때 깨끗하게 절단을 다시 했지만, 내가 약도 잘 안 먹고 회복도 더뎌 수술한 부위가 괴사 한 것 같다고 했다. 오른쪽 발목까지 절단이 된 재수술의 기억 없던 나는 부산으로 온 첫날부터 그렇게 한 달을 넘게 병원에서 지냈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처음 어린 딸의 발가락들의 절단을 알았을 때, 그리고 봉합을 하지 못 한채 오히려 더 절단해야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들었을 때 그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보태어 오른쪽 발목까지 또 절단을 해야 한다니 엄마, 아빠는 그걸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나는 아직 부모가 되지 않았음에도 가슴이 너무 아파 눈물이 쏟아지는데,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 아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이지 않은가? 얼마나 그 현실이 두려웠을까? 엄마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닦아냈을까? 엄마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내가 외갓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외갓집에 갔더라도 아빠가 일찍 데리러 왔다면, 아니 무엇보다 넘치는 호기심으로 그 기계 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란 말이 절로 깨달아진다. 36년을 오른쪽 발목을 잃은 채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 거짓말 같다. 되돌리고 싶은, 놓을 수 없는 5살 그때의 나여서일까? 오늘도 병실에 있는 내가 그려진다.






통증이 조금 줄어들었던 나는 병원 생활이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병실은 2인실이었는데 옆 침대 언니는 7살이었고, 이름은 소영이었다. 집 부산이었던 언니는 재미있는 책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언니의 아빠가 매일 병원을 들렀다. 나는 아빠 얼굴을 언제 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언니가 제일 부러웠던 것은 내가 무척 먹고 싶었던 언니의 삼각형 우유였다. 나의 하루 간식은 기껏 알루미늄 뚜껑이 씌워진 요구르트 1개가 다였는데 언니는 딸기우유도 초콜릿우유도 삼각형 포장 우유로 먹었다. 나는 며칠을 참고 요구르트 몇 개를 모아 언니에게 바꿔 먹자고 했다. 자주는 안 바꿔줬지만 한 번씩 소영 언니는 착한 언니로 변해 삼각형 우유랑 내 요구르트들을 바꿔주곤 했다. 동물 그림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여러 장이 짧게 엮어진 조그마한 마분지 두께의 책들도 부러웠다. 언니는 그 단순한 그림책은 내게 기꺼이 여러 번 빌려줬다.


소영 언니는 다리 한쪽 위에 미니 비닐하우스 같은 것을 두었다. 나중에 엄마한테 듣기로는 언니는 교통사고 환자였다. 우리가 조금 더 자란 국민학생이 된 어느 여름날 소영 언니네 가족은 시골의 우리 집에 놀러 왔었고 계곡에서 수영을 하며 같이 놀기도 했다. 아주 가끔 소영 언니 엄마와 우리 엄마는 연락을 이어오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 뜸해졌다.








그 시절 즈음까지만 존재했던 색 바탕에 일자로 검정 줄이 그어져 있었던 간호사 모자가 기억난다. 그 간호모를 쓰고 하얀 치마에 카디건을 입었던 간호사 이모들은 내게 아침저녁으로 주사를 놔줬다. 아프게 주사를 놔주는 간호사 이모는 생긴 것도 작고 날카롭게 생기셨는데 주사 엄청 얇고 아팠다. 밥을 잘 먹고, 주사도 제대로 맞아야 회복이 될 텐데 그 이모의 주사를 맞을 때는 밥도 먹기 싫고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이모를 미워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이모의 주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아팠다. 주사가 아프니 죄 없는 간호사 이모까지 미웠나 보다.






목발을 짚고 절둑거리며 우리 방에 자주 놀러 오던 삼촌인지 아저씨는 조금 퉁퉁하게 생기셨다. 삼촌이 하던 쓸데없는 농담은 어쩔 때는 엄청 웃기고 재미있었지만 어느 때는 귀찮고 이상했다. 삼촌은 우리가 귀여워서 놀아준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나는 삼촌이 그냥 심심한 아저씨 같이 보였다. 우리 방에 놀고 있으면 간호사 이모가 덩치 큰 삼촌의 주사를 놔주기 위해 병실을 종종 찾아왔.






삼촌은 벌써부터 보이지 않았고, 소영 언니도 퇴원을 해 병원을 떠났다. 5살 어린아이가 좁은 병실에 가만히 누워 지낸 지 이미 몇 주가 지났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까지 종종 기억나는 걸로 봐서는 깍쟁이 소영 언니와 언니의 엄마, 얄밉던 간호사 이모, 아주 잠깐 만났던 순둥이 삼촌은 내 심심한 병원생활을 소소하게 추억할 수 있는 인연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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