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명으로 가득 찬 교실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출몰한다. 그날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무슨 일인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전체 다 책상에 올라가서 무릎 꿇고 눈을 감으란다. 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체기합이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선생님을 편하게 생각해서 자신의 의사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편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선생님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려운 존재였다. 선생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 말은 곧 법이 되어 아이들을 움직였다.
선생님의 손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사랑의 매'가 들려있다.
오늘 등장한 사랑의 매는 30cm 자. 자로 손바닥을 몇 대 때렸겠거니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선생님이 매질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앞으로 쭉 내밀었다. '손바닥'이 아닌 '손 등'을. 선생님은 오늘도 자를 세웠다. 자를 눕혀서 때리면 별로 아프지 않아'체벌 효과'가 떨어질 수 있으니 좀 더 강력한 충격을 주어 아이들을 변화시키려는 강력한 의지였으리라. 그리고 칼날처럼 세워진 30cm 자는 맨 앞 친구부터 차별 없이 우리의 손 등을 탁! 탁! 탁! 세 번씩 가격했다. 왜 단체기합을 받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 세워진 자가 손등을 스쳐간 고통은 뼈 마디마디에 그대로 새겨졌다.
# 내 짝은 '날라리'(?)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내 짝꿍은 키카 작고 마른 체형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 웃을 때면 덧니가 매력적이었던 친구다. 나에게는 좋은 짝꿍이었는데 그놈의 교복 치마가 문제였다. 요즘이야 교복 치마를 미니스커트로 만들어 입는 일이 다반사지만, 그 당시엔 짝꿍이 교복 치마의 길이를 좀 줄이고 몸에 딱 달라붙게 줄인 것이 선생님의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나 보다.
중학생이 되니 키가 자란 만큼 '사랑의 매'도 자라 있었다.
오늘의 체벌 도구는 '쇠 막대기'다. 정확히 재어보지는 못했지만 5~60cm는 족히 되어 보인다. 소재도 진화했다. 그것은 마치 교실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통 네 모퉁이를 지탱하고 있는 그것과 흡사했다. 가만히 보니 우리 학교에 계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 검은색 쇠꼬챙이를 연상시키는 사랑의 매를 들고 다녔다!
나는 그 당시 얌전한 축에 속하였으므로 그 쇠 막대기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으나, 짝꿍은 달랐다.
교복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오고 타이트하게 줄인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친구를 교무실로 불렀다. 나는 친구를 보려고 간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잠깐 교무실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친구는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검은색 쇠꼬챙이가 사정없이 친구의 마른 허벅지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각자의 일을 할 뿐, 아무도 그 친구가 맞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몇 대를 때리는 건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차마 친구가 맞는 것을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어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서 보랏빛으로 사정없이 물들어버린 친구의 허벅지를 보았다.
그날 하굣길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치마가 짧은 여학생들이 줄지어 버스에 올라탔다. 내 시선이 그녀들의 다리에 꽂힌다. 허벅지는 치마로 가려지기라도 하지, 다른 반 선생님은 최소한의 배려심도 없는지종아리가 시퍼런 여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외면하고 싶었다. 교복 치마를 좀 줄인 것이 나처럼 무릎 아래까지 펑퍼짐하게 입고 다니는 것보다 더 예쁜 것 같은데.
물건을 훔친 것도, 친구를 때린 것도 아니다.꾸미기 열정이 한창 폭발할 사춘기 시절 촌스러운 교복을 좀 예쁘게 입고자 했던 그친구의 패션감각과개성 표현이 여학생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쇠 막대기로 사정없이 가격하여 시퍼런 피멍을 남길 정도의 대역죄인가? 그 친구를 체벌한 선생님은 혹시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을 겪고 어딘가 분풀이를 할 곳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중학생이었던 내 마음이 동요했다. 그 일렁임은 '분노'와 닮아 있었다.
# 당구 큐로 맞다
기술가정 선생님은 유난히도 키카 큰 여자분이셨다.
큰 키만큼체벌 도구도 그에 걸맞았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다. 내가 봐 왔던 30cm 자 또는 검은색 쇠 막대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당구장에 가 본 적은 없었으나 TV에서는 본 적이 있다. 저걸로 설마 학생들을 때릴까 의심했다. 아니겠지. 그냥 겁이 나 주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라 생각했다.
하필 그날 나는숙제를 내지 못했다.
안 했는지 못했는지 깜빡 잊고 못 챙긴 건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숙제를 안 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숙제를 안 낸 학생들을 호명했던기술가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내 이름 세 글자가 불렸다. 혹시 아파서 숙제를 못했는지, 체험 학습으로 몰라서 못했는지, 했는데 안 가져온 건지 선생님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숙제를 안 냈으니 변명의 여지없이 나는 조용히맞아야만 하는 운명이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힘을 줘야 할지 빼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1m 50cm는 돼 보이는 저 기다랗고 굵은 당구 큐로 손바닥을 잘못 맞으면 혹시 뼈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짧은 순간 걱정도 되었다. 나는 최대한 손에 힘을 주어 쫙 펴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피를 뽑을 때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내 가여운 손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얼굴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당구장에 있어야 할 큐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사정없이 내 손바닥 위로 내리 꽂혔다.
'탁! 탁! 탁!'
"아...!"
신음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25년 전의 사건이라 세 대인지 다섯 대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이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스윙을 했음은 분명했다. 골프 클럽을 흔들 때 '휙' 하고 나는바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숙제를 내지 않은 대가로 죄인의손바닥 뼈는 한참을 부어있어야 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사랑의 매'에 '사랑'은 없었다.
# 체육 선생님은 '가위손'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우리 학교는 두발 제한이 있었다. 졸업하면 머리를 자유롭게 기를 수 있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 3도 '가위손 선생님'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가위를 들고학교를 활보하는 선생님은 가위손을 연상케 했다.
초록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여자 체육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등장했다.
날카로운 가위날만큼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들의 머리를 살폈다. 그 모습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와 흡사했다. 선생님이 뒤편에 앉아있던 나를 향해 걸어온다. 이미 단발머리였던 나는 여태껏 미용실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머리카락을 맡겨 본 적이 없다. 그 당시 나는 귀 밑 4~5cm 정도 길이의 단발이었는데 우리 학교 규정은 귀 밑 3cm 다. 가위손 선생님은 내 오른쪽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고 사정없이 가위손을 놀렸다.
'싹둑!'
머리카락 한 움큼이 교실 바닥에 흩날린다.
나는 조용히 교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었다. 반 친구들이 다 보고 있었기에 창피했다. 화장실로 뛰어가 거울을 보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커트 실력을 보아하니 미용을 배운 솜씨는 아닌데. 대체 남의 집 귀한 자식의 헤어스타일을 얼마나 더 이 지경으로 만들 참인지!
나는계단형 머리가 되어 있었다.
나 말고도 가위손에게 당한 여학생들이 거울 앞에서 탄식했다. 그 상태로 수업이 다 끝나고 미용실로 향했다.
"머리 다듬어주세요."
"어머, 학생. 머리가 왜 이렇게 됐어?"
"학교에서 머리 길다고 선생님한테 잘렸어요."
"어머나! 미용실 가서 자르라고 할 것이지, 이렇게 싹둑 잘라놔서 이 길이에 맞추려면 많이 짧아지겠는데."
그날 잘려나간 것은 비단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나의 자존심도, 선생님에 대한 신뢰도 짧아진 머리카락만큼 한 움큼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