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계절
가을산은 언제나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화려하다.
짙은 초록이 천천히 불길로 번져 오르며 온산을 물 들일 때, 산은 스스로 자신의 한 생을 살아냈음을 보여준다. 가을의 산에서는 이 계절 시간의 냄새가 묻어난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발밑의 낙엽이 사각이며 지나온 여름을 먼발치로 밀어내고 있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일기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듯하다.
매년 이 계절, 이 맘 때면 이 산을 오르는 것이 좋다.
산은 스스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하지만, 그저 붉게 물 든 산을 보기 위해서 오르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계절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산은 언제나 시간을 따라 변함없는 모습이지만, 나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올해의 단풍은 유난히 붉고, 그 붉음 속에는 내가 잃은 시간들이 조용히 숨어 있다.
산자락을 따라 물이 흘렀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돌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었고, 그 물소리가 내 마음의 돌틈을 파고들었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그 소리의 결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가을의 물소리는 단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기억 속 말들의 무덤을 스쳐가며, 잊힌 이름들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운다.
산속의 나무들은 모두 제 이름을 잊지 않고 서 있다. 비바람에 꺾인 가지도, 벌레 먹은 껍질까지도 나무의 생애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결코 그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서서 오래된 늙은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나무의 뿌리는 마치 산의 심장을 움켜쥔 손처럼 굳세게도 깊고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세상은 늘 변화하며 밝고 화려한 곳으로 눈을 돌리지만, 나무의 뿌리는 오히려 더욱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빛을 향해 자라나는 나뭇잎들과 달리, 뿌리는 어둠 속에서 삶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생명을 가진 것들의 이치일 것이다. 생명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자라 나오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은 울음 같기도 했고, 노래 같기도 했다. 바람의 손끝이 대나무의 속을 스칠 때, 그 안의 허공이 울림이 되어 퍼졌다. 나는 그 소리를 ‘대나무의 울음’이라 부르기로 했다.
텅 빈 것만이 낼 수 있는 깊은 울음, 채워지지 않은 존재의 빈자리에서만 그런 순결한 소리가 나오는 듯하다. 그 울음을 듣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도 바람이 불어온다.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 하나, 얼굴 하나가 곧 바람을 따라 흩날려왔다. 가을은 그렇게도 내 안의 빈자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나는 오래된 기억의 냄새를 맡는다.
계곡의 물소리가 잦아들고,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쯤엔 나는 다시 산아래 사람의 마을로 내려왔다. 길가에 부드럽게 늘어선 돌담 위로는 빨갛게 익은 대추가 담너머로 매달려 있었다. 대청마루 옆으로는 언제 깎아서 걸어놓은 것인지 감이 말라가고, 감나무엔 까치밥이 몇 알.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가을은 그렇게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돌담을 지나 당산나무 아래에서 나는 다시 멈춰 섰다. 저 산의 뿌리와 나의 뿌리는 어쩌면 맞닿아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흙으로 돌아가면, 그 흙 속에서 또 다른 나무가 자랄 것이다. 그 나무의 잎이 떨어지고, 그 잎이 다시 땅이 되어, 누군가의 발길 아래 짙게 깔릴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가을은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었다.
문득, 대나무숲 쪽에서 다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어둠의 가장자리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그 울음이 슬프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과 조화하는 하나의 숨결처럼 들렸다.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흘러감 속에서도 남는 소리가 있다. 가을은 그렇게 남는 것들로 여유로운 계절이다.
그날, 나는 오래도록 대나무숲 아래 계곡가에 앉아 있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의 그림자, 어둠 속 불빛, 장작이 타는 냄새, 고요한 마을의 정적.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가을은, 사라지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계절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