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때로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안톤 체호프
한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하지만, 침묵하던 시간은
그 모든 시간들이 사랑이었노라고 끝내 이야기했다.
질문자 : 사랑은 때로 침묵 속에서 깊어진다는 말처럼,
침묵 속에서 혜인 님과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깊어져왔을지 궁금해요.
혜인 : 어렸을 때는 엄마를 무서워했고 아빠를 가까이 두고 단짝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몸장난도 많이 치면서 아빠랑 친구처럼 지냈죠.
거의 20대 초중반까진 그렇게 지냈는데, 어머니가 일하는 시간을 줄여가시고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게 된 최근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질문자 : 그렇게 어머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셨군요.
그런 변화와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도 변하셨지만
혜인 님도 변화하셨을 텐데, 그 변화의 과정에서 힘들진 않으셨나요?
혜인 : 지나올 때는 잘 모르죠.
우리가 변화하는 중인지요. 특히 엄마와는 죽어라 싸웠어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울고 장난도 아니었죠.
아버지와는 온도가 조금 미지근해졌지만 크게 변화한 건 없어요.
여전히 날 조용히 믿어주시지만요.
다만 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버거우신 것 같아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시니 몸도 마음도 버거우실 것 같아요.
질문자 :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 그리고 배운 점이 있을까요?
혜인 : 이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제 부모님은 부모님의 삶을 생각할 나이가 됐어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편안해졌고 앞으로를 내다보게 됐어요.
제가 진정으로 원하기도 했던 부분이니까요.
나 자신으로 건강하고 바르게 오래 살아가는 것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은
부모님이 부모님의 삶을 생각할 나이에
나를 생각해 주고 그리고 변화하신 것,
그 사실 자체만으로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거고
초인적인 힘을 내고 계신 거구나 깨달았어요.
질문자 : 아무것도 아닌 채로 지나온 시간들인 것 같아도
사랑을 알게 한 변화의 시간들이었네요.
혜인 : 사랑 안에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든든한 빽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질문자 : '나는 사랑 안에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는 가지고 있으면서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혜인 님은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쯤에서,
마지막 질문하고 마무리해 볼까요?
혜인 님은 이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세요?
혜인 : 조용히 곁을 지켜드리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이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이만큼 키우신 것처럼은 못해요.
다만, 쉬고 싶을 때는 쉬어갈 수 있는 나무그늘이 되어주고 싶어요.
부모님이 부모님의 삶을 살다가 버거울 때면
잠깐 피해 갈 수 있는 그늘이요.
아버지한테 술 한잔 사줄 수 있는 딸,
엄마의 신경질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딸,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내면이 단단해지고 싶어요.
질문자 :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이 글을 읽게 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혜인 : '우리는 사랑 안에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왔다.'라는 말을
셀프 가스라이팅하듯이 믿으셨으면 좋겠어요.
사랑은 꼭 연인 혹은 부모님의 사랑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비 온 뒤 개인 파란 하늘을 통해서도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이라 믿으시고,
모르는 누군가가 건넨 작은 친절도 사랑이라 믿으세요.
지나가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웃을 때,
그보다 더한 사랑이 없잖아요. 그렇죠?
삶은 끝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다정한 모습으로 찾아올 겁니다.
<딸 이혜인> 편을 관통하는 말은 '사랑'이었다.
사랑을 알게 한 변화의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무엇보다 사랑을 믿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어코 부모님은 나를 또 키워냈다.
이제는 내가 나를 키워낼 차례다.
<딸 이혜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