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택형 짠순이의 소비철학 (1)

by 이어진

작년 이 맘때의 일이다. 나는 스타벅스 한 가운데에서 1대1 금융 컨설팅을 받고 있었다. 무려 회계사님으로부터, 무려 3시간씩이나. 내 돈으로 회계사님의 시간을 산 것은 당연히 아니고 금융감독원에서 무료로 해주는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 회계사님은 컨설팅 전에 숙제를 내주셨는데, 보유한 자산의 종류와 금액, 채무, 한 달 동안의 지출 등을 엑셀 파일에 정리해 오라는 것이었다. 내 숙제를 다 훑어보신 회계사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손에 들고 말했다.


"전 이제 그란데만 마셔요."

"네? 아.. 사이즈업?"

"네. 사이즈업은 500원 추가해야 되거든요? 그 500원 안 아끼려고 돈 버는 거에요. 커피 아껴먹고 싶지 않아서."

"와.. 그렇군요.."

나는 회계사님의 근로 목적은 아메리카노 사이즈업에 있구나.. 그렇다면 나의 근로 목적은 뭘까...하는 고민을 하며 톨사이즈의 커피를 한 모금씩 아껴 마셨다.

"어진님 이번 달 지출 항목을 보니까...어이고... 돈을 거의 안 쓰시네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아하하, 이번 달이 유독 그러네요. 원래는 이정도까진 아니에요."

그 말은 겸손을 위해 뱉은 말이지만, 실제로 나는 지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쓰긴 쓴다. 쓸 때는 쓴다. 회계사님의 사이즈업 500원처럼 돈을 쓸 때 발동 되는 나름의 철학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짠순이는 어디에 돈을 쓸까? 어떤 가치관으로 지출을 할까?


1. 오래 쓸 수 있는 것으로 산다.

나는 소비를 하기 전에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습관이 있다. 한 번의 소비로 5년~10년 정도는 버텨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소비가 두 번째, 세 번째 소비를 최대한 지연시켜준다면 그것만큼 합리적인 소비가 없다. 실제로 내 옷장 속에 있는 옷은 5~10년 된 것들이 많다. 노트북은 10년을 쓰다 올 해 드디어 바꾸었고, 자동차는 5년이 넘었다. 아마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타고 바꿀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해보자면, 다 낡아빠진 고데기는 15년을 썼고 침대와 책상, 의자는 태어나서 처음 가져본 것을 여지껏 쓰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왕초라고 놀릴테지만, 사실 그것들은 나의 자랑이다. 오래된 손 때가 잔뜩 묻은, 지금 당장 갖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그 물건들은 내가 아끼는 '내 것'이다.


물건을 오래 쓰려면 유행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오래 쓸 물건을 사려고 하면서 유행에 기민해야한다고? 그렇다.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기어코 유행을 피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물건은 이상하게 오래 쓰기 곤란하다. 오래 쓸 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신발로 예를 들어보자. 한 때 나이키 범고래 운동화가 우리나라에서 대유행을 한 적이 있다. 만약 그때 범고래를 샀다면 지금까지 신고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신발을 볼 때마다 '어? 저거 3년 전에 신던 건데... 3년째 신고 다니나봐.' 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최대한 스테디 셀러를 사려고 한다. 언제 산 건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그리하여 아주 오랫동안 신고 다닐 수 있도록. 옷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유행하는 브랜드나 스타일은 반드시 피해간다.


또, 비싸더라도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 비싼 가격에 가슴이 쓰리다 못해 눈을 질끈 감고 싶지만, 결국 그것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가격이 저렴한 물건은 대체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반면 비싼 물건은 신기하리만치 고장이 잘 안 난다. 어쩌다 고장이 나더라도 AS가 가능하다. 그러면 다음 번 소비를 막을 수 있다. 싸게 샀다가 망가져서 두 번, 세 번 사는 것보다 짱짱한 고가의 제품 하나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통장 건강에도 이롭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사는 것이 좋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이런 말을 했다. "집과 차처럼 오래 쓰는 것은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사야 한다." 나는 그 어른의 말을 모든 물건에 확장해서 적용 시키고 싶다. 내 목표는 어떤 물건이든 오래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야 후회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적당하다는 이유로 샀다가, 쓸 때마다 두고두고 후회했던 경험이 내게는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오래 쓸 수 있고, 유행을 잘 타지 않으며, 비싸더라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산다. 이 모든 걸 만족하는 브랜드가 애플이다. 그렇다. 나는 앱등이다. 내가 처음 아이폰을 샀던 2014년에는 애플 이외의 스마트폰들은 잔고장이 잦았다.(요즘에는 어떤지 안 써봐서 잘 모르겠다.) 2년 이상 쓰면 버벅임이 생기거나 아예 고장이 나버리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애플 제품은 달랐다. 잔고장이나 버벅임이 없고, 3년을 넘게 써도 거뜬했다. 게다가 새로운 아이폰이 나와도 디자인이 급격히 달라지지 않아서 오래 쓴 물건이라는 티가 잘 안 났다. 심지어 어떤 버전은 신 버전보다 디자인이나 카메라 기능에서 더 매력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오래 쓰면서도 '분명 예뻤던 것 같은데...'하는 변덕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잘 산 물건이 된다. 조금 비싸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소비를 지연시켜줌으로써 합리적 소비를 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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