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미치광이 전략'의 원조는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그는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미치광이 연기를 했다. 배후의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전략핵 폭격기를 북극 영공에 연속 출격시키고 유럽 주둔군에 핵전쟁 경계령을 내렸으며, 항모전단을 동원하여 북베트남 영해를 봉쇄했다. '나는 드디어 미쳤으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 막가파식의 행동은 실은 고도로 계산된 협상 전략이다. '아 저 미친 x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 달래 보자'라는 반응을 유도해 협상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최종 목표다. 닉슨의 메소드(method) 연기는 성공했을까? 북베트남은 배우를 믿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파리 평화 협정이 맺어진 것은 4년 뒤다.
미치광이 전략의 위험성은 (낮은 성공률과는 별개로) 그것이 협상 전략인지, 아니면 그자가 정말 미치광이인지 그 경계가 때로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핵을 쌓아 올리는 냉전을 풍자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는 진짜 미치광이 장군 하나가 인류 공멸의 핵 버튼을 누른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고, 냉전(cold war)의 시대보다 더 위험한 열전(hot war)의 시대가 도래했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친구는 푸틴이 핵을 쓴다면 그 1순위는 유럽 최대의 물류 거점인 로테르담이 될 거라고 걱정했다. 1989년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다음 세기에 더 많은 전쟁과 또 다른 미치광이들의 겁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 책상에는 핵 버튼이 있다."
"내 책상 위의 버튼은 더 크고 강력하다. 심지어 작동도 한다."
엄혹한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미치광이 전략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적응이 빠른 우리에게 이제 이런 유의 상투적인 서사는 웃프기까지 하다. 우스운 이유는 두 광대가 먼지가 내려앉은 그 버튼을 놓고 떨어대는 허풍 때문이고, 슬픈 이유는 그럼에도 그 종말의 망치는 광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언제든 우리를 내려칠 기세로 머리 위에서 윙윙 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적인 영역에서는 어떨까?
직장이나 모임에서 종종 '미치광이 전략'을 탑재한 사람을 만난다. 이들은 악수를 하면서부터 손을 비틀고 어깨를 두들기며 친한 척 하대를 시전 한다. 타깃이 정해지면 포식자와 같은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받아내기 위해 목을 조인다. 누를 수 있는 핵 버튼은 없지만 그만큼 신중할 필요도 없기에 상상을 초월한 언행으로 수치심을 안기며 기를 꺾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누군가 부서의 발전을 위해 용기를 내어 벌벌 떨며 건의를 한다. 그의 답은,
"야, 그 부서 아예 문 닫게 해 줄까?"
목숨 걸고 덤비라는 불한당에게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은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의 메소드 연기에 더 빠져들고 종국엔 같잖은 권력의 버튼을 마구 눌러대는 미치광이로 완벽하게 빙의한다.
미치광이 연기를 주특기로 하는 정치인들이 대중을 향해 쏟아내는 저열한 폭력적 서사는 전염성이 강하다. 르완다의 대학살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폄하하며 그들의 목을 따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의 목을 딸 것이라는 한 정치인의 선동에서 시작됐다. '불법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미 대선 후보의 망언은 결이 그와 다르지 않다. 소름이 돋는 점은 지지율이 보여주듯 그의 화법과 대상화의 선동을 다수의 대중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를까?
인터넷 미디어에는 정치든, 사건 사고든, 연예든, 날씨든, 기사의 내용과 상관없이상대방의 출신 지역과 정치 성향, 연령과 성별을 폄훼하는 댓글들이 빼곡하다. 관용과 존중, 대화와 수용의 여유는 미치광이들의 아우성 속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한강 작가는 내면의 고통을 오롯이 품어 진주처럼 정제된 언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온몸으로 폭력에 저항한 그의 글에 대해 대해 (출신과 소재를 시비 걸어) 같은 나라말로 쏟아내는 광기 어린 폭언들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것은 전략적 연기일까 진심일까? 노벨 평화상 때와 마찬가지로 한림원을 규탄하며 수상 취소 시위까지 한 것을 보면 이 또한 미치광이 전략인 것 아닐까 하는 절망마저 든다.
모두가 모두에게 화가 난 작금에, 광인의 전략은 이미 그 유통기한과 희소가치가 끝났는 지도 모른다. 미치광이가 하나라면 협상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둘이라면 협상은 물 건너가고 겁쟁이를 가리는 치킨 게임을 해야 한다. 이미 다수가광인이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면 이것은 더 이상 전략이아닌실존이다.칼보다 날카로운 펜으로 타인을 난도질하고,분노와 소음만가득한광기의 언어로 서로를 때리다 보면 결국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멸의 아노미(anomie)다.
공포와 혐오를 주입하는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이 '미치광이의실제(madman practice)'로 폭주하여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