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맑은 7

by 우연북스

어느새 불판 위 대화 주제는 임사원의 조카 자랑에서 김팀장의 육아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고기를 뒤집듯 금새 주제가 휙휙 바뀌었다.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에 공감을 잘하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흥미로운 척 적절한 맞장구를 섞어가며 듣고 있었다. 임사원만큼은 꽤나 진심으로 김팀장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임사원을 이모가 아닌 엄마라고 순간 착각할 정도로 아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흘러넘치는 얼굴이었다.


여덟 시쯤 회식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지하철로 가면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지만 동선이 겹치는 동료와 예의상 같이 지하철을 타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고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 식당 앞에 잠시 모여서 인사를 나누다 다들 집에 어떻게 가냐는 김팀장의 말에 한 방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그걸 탄다고 말했다. 집으로 직행하는 버스는 없었다. 버스를 탄다고 해서 아무도 내가 동료들과 집 가는 길을 같이 하는 것을 꺼려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작은 의문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관심이나 그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튀는 것을 극도로 경멸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 이럴 때 산소 같은 여자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


버스 정류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해원 주임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회식 자리에서 잔뜩 쌓인 긴장을 푼 상태였는데 내 이름이 들린 순간 어쩔 줄 몰라 바짝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멈춰 누구의 목소리일까,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집에 한 방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들켰을까 하는 별의별 생각으로 머릿속이 뒤엉켰다. 천천히 몸을 돌이키자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이루리 씨가 보였다.


"주임님, 걸음 진짜 빨라요! 겨우 따라잡았어요."

"왜? 여기에..."

"저희 회식 일찍 끝났는데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어서요. 아까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가셔서 여기까지 따라왔네요."

"아, 2차로 모이고 있어요? 저는 괜찮은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전화로 말해도 되는데..."

"아뇨, 주임님이랑 마시고 싶어서요. 저희 둘이서요."


당황스러운 상황을 판단할 새도 없이 이루리 씨가 내 팔을 가볍게 잡고 근처 작은 카페로 이끌었다. 우드톤의 인테리어와 뜻 모를 팝송의 노랫가락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자리를 잡고 이루리 씨가 주문을 하고 오겠다며 먹고 싶은 메뉴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따듯한 밀크티가 어떻겠냐고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밀크티, 내가 밀크티를 좋아하는 것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팟타이를 먹을 때도 내 취향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밀크티를 팔아야 할 텐데 라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문을 하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를 위하는 모습, 내 취향을 기억하는 노력. 그것이 싫어서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녀가 남을 살필 수 있는 여유까지 겸비한 것 같아 치기 어린 질투가 마음속에 일렁였다. 이 일렁이는 질투의 불씨가 커져버려서 감당 못할 큰 불이 되어버릴까 봐 나는 그녀를 멀리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의 행동이 위험한 불씨가 아닌 따듯한 모닥불처럼 추운 마음을 데워주었다.

음료를 들고 다가오는 이루리 씨가 보였다. 눈에 고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눈물을 말렸다.


"주임님, 다행히 밀크티를 팔더라고요. 여기 인테리어도 너무 예쁘죠? 우연히 들어왔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저는 이럴 때 너무 행복해요.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 이상일 때, 이런 추억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아요. 예상한 즐거움보다는 예상치 못한 행복, 힘듦 이런 것들이 결국 오래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진심이구나 싶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나에게 다가왔다. 어떤 편견이나 목적 없이 다가왔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마음이 그녀를 밀어냈던 것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루리 씨, 고마워요."

"아니에요. 밀크티쯤이야 얼마든 살 수 있어요."

"밀크티도 고마운데 티 없이 맑아서 고마워요. 루리 씨 옆에 있으면 나도 맑아질 수 있을까요?"

"저도 은근 음흉한 구석이 있는걸요? 저는 주임님의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 부러워요."

"저도 은근 유리멘탈인걸요?"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에게도 이 날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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