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없이 맑은 6

by 우연북스

두 번째 고비는 중학생 때의 일이다. 가로등 불빛도 꺼진 깊은 밤이었다. 메케한 냄새가 희미하게 방 안으로 번지는 것을 잠결에 느꼈다. 눈을 비빌 틈도 없이 큰일이 났다는 직감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옆에서 자고 있던 동생 해주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탄내는 계속 흘러들어왔다. 그날 집에는 나와 해주 단둘이었다.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해주가 종이뭉치와 박스를 태우고 있었다.


"해주야" 한 마디를 하고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바가지에 물을 퍼담았다.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몇 차례 물을 뿌리자 불길이 잡혔다. 불을 끄는데 혈안이 되어서 평소 입지 않던 원피스 잠옷 차림에 머리를 풀어헤친 해주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침묵에 삼켜진 한밤 가운데 해주도 그 밤의 일부인 듯 입을 굳게 닫고 멍하니 서있었다.


왜 그런 것이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을까 봐,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해주는 감정이 무딘 아이라고 생각했다. 싫은 소리는 잘하지 않았고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로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겨도 정말로 다 괜찮은 사람처럼 곧잘 웃기도 하는 아이였다. 한편으로 그런 탄력성 좋은 성격이 부러웠다. 감정의 역치가 높고 쉽게 심각해지지 않는 아이. 그 생각이 틀렸던 것일까. 원피스 잠옷 차림의 해주를 마주 보고 있으니 약간의 섬뜩함이 느껴졌다.


"괜찮아?"

해주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다친 데 없어? 어디 아프면 병원 가자. 괜찮으니깐 아프면 말해."

여전히 해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누가 뭐라고 했어?"


"언니. 이제 나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여기 있던 종이들 내가 태워서 없었어. 내 마음대로 없앨 수 있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야."


무슨 말을 더 보태면 탈이 날까 봐 아무 말하지 못했다.

해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범벅이 된 그을린 종이 잔해와 까맣게 탄 장판을 보니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곧 돌아올 부모님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없었던 일로 숨길 수 있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커멓게 타서 구멍이 난 장판은 내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하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는 그에게 나와 해주가 케이크 위 촛불을 켜다 실수를 해서 불이 났지만 크게 번지지 않아 별 일이 아니었다고 둘러대었다. 해주가 집에 불을 낸 것을 알면 가만있을 그가 아니었다. 엄마는 해주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걱정하기보다 그가 쏟아낼 화를 막는 것이 먼저였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켜켜이 쌓여갔다.


이 사건 이후로 엄마와 해주 사이에는 벽이 하나 생겼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엄마도 해주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사건이 묵혀질수록 엄마와 해주 사이의 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고 해주는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갔다. 해주의 독립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예정된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집을 떠난 해주는 간간이 안부를 전해왔다. 연락이 안 되면 자신을 걱정할까 봐, 그 관심이 싫어 미리 선수 치듯이 보내오는 연락인 듯했다. 진지하고 긴 답장을 보내면 도망가버릴까 봐 항상 담백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간결한 답장만 보내곤 했다. 해주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독립, 그로 인해 나에게 전가된 해주 몫의 짐을 생각하면 해주가 진심으로 미울 때가 있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해주밖에 없었다.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린 동생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서러워서 소리 없이 울던 날들이 많았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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