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죽을 고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찾아왔다. 무덥던 여름, 계곡으로 피서를 떠난 날이었다. 방금까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입김 같은 뜨거운 열기 속 도시에 있었던 사실이 무색할 만큼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계곡이었다. 산속 깊이 올라가고 또 올라가야 발견할 수 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이곳에는 자연이 빚어낸 천연 미끄럼틀 같은 바위가 있었다. 바위 사이로 거센 물줄기가 빠져나와 튜브를 타고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었다.
커다란 튜브의 가운데 구멍에 엉덩이를 끼운 채 바위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위로 몸을 던졌다. 물살은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고 거셌다.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튜브가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물속에 빠져 온몸이 잠겨버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영도 할 줄 몰랐다. 발이 바닥이 닿으면 온 힘을 다해 박차고 뛰어서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수면 위로 나왔다 가라앉고 다시 바닥을 밀고 올라와 숨쉬기를 반복하다 그만 타이밍이 꼬여 물속에 잠겼을 때 숨을 쉬어버렸다. 그 바람에 코 속으로 물이 왕창 들어와 버렸다. 숨이 막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물속의 고요함은 적막함으로 바뀌고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새소리, 물소리,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세상이 순간 돌변하여 감추고 있던 깊은 어둠 구덩이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나를 빨아들였다.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숨을 못 쉬어서 죽을 것 같은 아픔보다는 이대로 삶이 끝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의 고통이 앞섰다.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져 가는 중 누군가 뒤에서 나를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물 밖으로 꺼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채로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내 주위로 어른들이 몰려와 괜찮은지 물었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고요한 물속에서 나와 어른들의 말소리가 잔뜩 섞여 들리자 정신이 없었다. 몸 마디마다 감각이 살아났다. 그제야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눈물 새어 나왔다.
어른이 된 지금도 불현듯 그때의 물속에 빠진 느낌이 들곤 한다. 사지가 묶여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는 기분에 끝없이 추락하고 바닥을 치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붙잡아 현실로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물에 빠진 어린 내가 느꼈던 죽음과 유사한 감정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어딘가에 붙어서 잊을만하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때 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조금은 행복해졌을까? 운명 같은 것을 믿지 않고 흥미도 없는 편이지만, 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만한 수위의 다른 일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패턴을 깰 수 없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패턴. 그저 그런 인생을 타고났음을 인정하고 행복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내 마음을 지키는 방어기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