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냥
1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2 그런 모양으로 줄곧.
3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그냥'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면서도 무거움을 가볍게 만드는 힘이 있다. 표현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냥 좋아요’, ‘그냥요’와 같은 말을 가볍게 던진다. 이 말이 지닌 배려와 무심의 경계 속에서 나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답을 손쉽게 충족시켰다. 이 말은 잦고 다양한 해외 생활에서 마주하는 문화차이를 완화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작동되기도 했으나, 섬세한 성격을 지닌 나의 말 습관이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참 무책임하면서도 편리한 이 한 마디는 텅 비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방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어야 할까. 이유 없는 끌림이나 호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맞춰주는 성격, 내가 좋아하는 걸 드러내지 않는 성격 덕에 꽤 많은 질타 어린 추궁을 듣기도 했다. 때마다 나는 단지, ‘그냥, 내가 좋아서’, ‘그냥 좋은 걸 어떡해’라고 답했을 뿐이다. 단순히 마음이 끌릴 수도 있고,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거나 숨기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Opacity(레이어 불투명도)’이다. 어디 섞여도 잘 스며드는 이 단어는 ‘그냥’과 굉장히 비슷하다. ‘그냥, 좋잖아요’ 더 깊게 나가지 않는, 모든 상관관계를 충족시키는 이 마법의 단어를 말하면 내게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학과에서는 ‘그냥’이라는 문장은 ’그냥’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정말 기피한다. 그냥도 다 이유가 있단다.
유학 생활을 하며 크게 표현하지 않고 보고 듣는 게 익숙했던 내게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날카로운 질문과 지적에 대한 답을 내놓는 과정이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나?’ ‘왜 좋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나?’ 수없이 밀려오는 질문들을 방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얼핏 보았을 때 ‘그냥’ 존재해 보이는 것마저도 ‘그냥’의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의 장단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보이는 것만큼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이유와 까닭이 있고, 이면에 담겨 있는 각자의 생각이 존재한다. 때문에 이를 탐구하는 과정은 ‘나’의 이유와 까닭을 스스로 묻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그냥 좋아하던 것들을 마주하며, 엉긴 감정과 생각을 풀기 시작한다. 그 이유를 찾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