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차가 많습니다. 그것은 대동맥에서 뻗어 나온 신선한 피처럼 저마다 목적지를 갖고 움직입니다. 심장의 주기에 맞추어 흐르듯 신호의 움직임에 자동차도 박동합니다.
진주엔 차가 없습니다. 적어도 서울에 비하면 말이죠. 진주의 차들은 목적지를 갖고 움직이는 혈액이 아닌 한 마리의 야생마처럼 거칩니다. 신호를 무시하는 것도 일상이고, 버스는 정류장을 무시하기 일쑤이죠. 진주의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자아가 강해야 합니다. 자기 어필을 해아만 기다란 야생마가 한 번쯤 뒤돌아 봐주거든요.
서울의 도로는 막 달리기 시작한 운동선수와 같고, 진주의 것은 제멋대로 박동하는 부정맥 환자처럼 보일까요? 나는 사실 도산대로에서 숨이 막힌 적이 있답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과 신호와 버스와 웃음 그리고 무표정, 그 속이 내재되어 있는 허무와 무제들을 선명히 느꼈습니다.
그것은 결코 호흡의 순환이 아니었습니다. 기계와 같은 차가움을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염통의 박동을 어색해하곤 구토를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기 무표정으로 걷는 사람과 자동차와 올곧은 걸음걸이 그리고 무거워 보이는 시계와 중후한 구두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요? 모두 허무의 혐오를 속에 담아둔 체로 각자의 내장에 비명을 내지르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서울의 박동에 몸을 맡긴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은 알 속의 핏줄이 묻습니다.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잘 살아간다면 어떻게 잘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잘 살아가지 못한다면 어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신가요
나는 비명을 받아줄 대상을 찾는 게 아니라 각자의 비명이 아름다운 사람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기엔 본질의 주파수부터 다르며, 타인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오만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한 타인은 타인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글을 적고 있는 와중에 신호가 한 번 바뀌었습니다. 한 번도 움직여본 적 없듯이 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나는 갈망합니다. 호흡 이전의 호흡을. 우리가 타인으로 불리기 이전엔 어떤 형태로 함께했기에 서로 공통점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요.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움직임은 언제 어디서 존재하여 우리를 완전히 고독하게 만들지 않으며,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 채로 흙에 묻히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 사이 신호가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나는 멈추었습니다.
다시 뻗어 나온 피로 돌아갈 시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