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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크로드 Mar 04. 2024

We did it. 공생의 향기.

서로를 Strangers라고 부른다. 룸메이트 3명과 나.




나는 생각보다 하늘에 가까이 닿아 있었다. 거센 록키산 바람이 나를 스치고 건조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겨울인 것처럼 바디 로션을 듬뿍 발라보았다. 미국 시골 하늘 아래에서 깊은 호흡을 통해 공기를 마셨다. Deep Breathing. 어둠이 다가오기 전에 이 공기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러한 노을을 늘 상상만 할 뿐이었는데 도착한 첫날부터 눈앞에 실제가 되었다. 가만히 처음 만나는 색상의 하늘과 구름의 선을 바라보았으며 그렇게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있었다.


Knock Knock Knock. 오후에 나를 안내해 주셨던 어학교 담당자와 누군가 함께 들어왔다. 꼬물거리며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덧 저녁이 되어 드디어 첫 번째 룸메이트가 도착한 것이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혼돈의 눈빛을 가진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반대편 방 2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 만난 어색함 속에서도 혼자는 해낼 수 없던 일들을 둘이서 협력하니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다. 홀로 남겨졌던 4-5시간 정도의 고독은 이 아파트에서 다시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룸메이트들과의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070, MP3, 네이트 온의 시대   



룸메이트는 070 전화기 사용을 위해 인터넷을 필사적으로 연결하려 시도했고,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성공했다 (물론 지금이라면 손쉬웠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이제는 매일 한국의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당시에 네이트 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친구들과 채팅을 하며 그리움을 달랬으며, mp3로 늘 음악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휴대폰은 당장 필요하지 않았기에, 미국에 도착하고 약 3개월 뒤에 구입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불편함을 못 견디며 불가능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다.






적응기.

서로를 Strangers라고 부른다.

미국 어학연수 룸메이트와의 대립과 보완의 지극히 소소한 일상.


하루 뒤에 대만에서 온 17세 학생이 도착했다. 그리고 2주 뒤에 19세 학생이 도착했다. 두 명은 친 자매였다. 얼굴보다는 헤어 스타일이 똑같았다.


기숙사라 불리는 곳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낯선 토양 위에 낯선 이들과 진짜 이해와 배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알람시계와 함께 우당탕탕 전쟁이 시작되었고, 저녁에는 언어의 장벽을 함께 넘나들며 울고 웃었다. 완성된 영어 문장이 아닌데 대화가 가능한 것이 바로 작은 기적이었다. 서로 다른 관습과 가치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허나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Strangers 낯선 사람들에게서 찬바람 쌩쌩 불어보라. 이 바람은 세상 어디서나 불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바람일 거라 생각하지만 꽤나 독특하고 매서운 바람이었다. 식량을 공유할 때의 문제, 생각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는 일, 청소 문제, 공용 공간과 도구를 사용하는 일 등이 그러한 찬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어설픈 누룽지가 되어  


낯선 땅에서의 어학연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핵심은 나의 정신을 도야하고 언어를 탐구하는 일이었지만, 휴식과, 식사도 신경을 써야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핵심 요소를 어느 정도 갖추고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햇반과 진공포장된 밑반찬, 참치, 라면, 몽쉘통통 덕분이었다.



다만 밥솥은 들고 올 수 없었고 나는 밥을 짓는 데 서툴렀기 때문에 거의 매일 냄비가 까맣게 되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소진된 햇반으로 인해, 연수 생활이 냄비와의 고군분투를 해야 하는 생활이라니. 꾸준한 연습 끝에 나는 누룽지를 제법 잘 만들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혼자 즐길 수는 없지. 공용주방은 서로의 문화를 체험하고 소통하는 중요한 전투 장소였다.







공생의 향기: 베이컨


나는 룸메이트들과 다양한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식탁 문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세명의 룸메이트들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 어떠한 식량도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생활에서, 특히 미국 시골에서 식량확보는 정말 중요한데 말이다. 우리 모두 타지의 생활이 처음이었다. 타인과의 삶에 적응하느라 어느새 식량 관리를 소홀히 하며 어린 친구들과 나의 식량을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룸메이트들이좋아하지 않던 밑반찬을 제외한 나의 주식량은 단 두 주 만에 소진되었다. 어느 순간 동이 난 나의 식량가방을 들여다보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한국 마트를 가려면 차로 40분을 가야 할 만큼 장을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우리 모두는 당연히 뚜벅이였다.



일단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미국 마트로 함께 장을 보러 갔다. 한국인 룸메이트는 본인은 밥을 잘 먹지 않는다며 초반에는 장 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대만 자매 2 (동생)은 자매 1 (언니)가 온 후로 식사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각자 개인 식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삼겹살 냄새가 집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만 자매 둘이서 베이컨을 구워 먹고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식량은 이제 오이지, 콩자반, 멸치볶음뿐이고 김도 참치도 라면도 다 사라진 후였다. 나는 초반에 콩 한쪽을 나누어 먹은 뒤에 정확한 계산과 보상을 꼭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중에 베이컨 향기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현실이 조금은 아쉬웠고 낯설었다. 결국 이것이 내가 배운 한국과 대만의 식사 문화였다. 한국은 서로를 배려하며 콩 한쪽도 아낌없이 나눠먹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대만은 개인의 몫을 엄격히 나눠 먹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대단하게 큰 희생 하거나 노력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밥 퍼주는 언니의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일에 견딜 수 없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 의견을 표현하며 타협점을 찾아내는 방법 등을 깨닫게 되었다. 서로를 존중하며 공생하는 법, 미국 땅에서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점점 적응해 가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풍요롭고 사랑을 담은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눔의 정신을 더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적응기를 마친 얼마 후부터 더욱더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기 시작했고 몸무게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사실에서 알 수 있었다.






우리 모두 처음이었어.

잘 해냈어.

We di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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