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렀던 나의 첫 퇴사
오프라인 설명회가 끝난 후, 내가 하게 된 업무는 그저 단순했다.
유선상으로 민원을 받게 되면, 일단 민원인의 불만을 들어준다.
다 들어주고 난 다음에는 "향후 시스템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원인이 포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계속해서 불만을 얘기할 경우에는 잠자코 듣는다.
길었던 통화가 끝나고 나면 민원인이 얘기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메모해 둔다.
정작 메모를 할 때는 민원인이 말한 내용에서 딱히 메모할 게 없었음을 깨닫는다.
10분이 넘는 통화 속에서 메모할 것은 딱 한 줄.
그 외에는 전부 메모할 가치도 없었던 짜증과 불만이 가득한 내용들.
민원인들의 불만과 불편함을 시스템에 반영할 수 있게 가지런히 정리를 해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시스템에 반영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나는 시스템 부서에 속해 있는 사원이었지만, 정작 하는 일은 CS팀이나 다름없었다.
매일매일이 의미 없는 일의 연속이었고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점점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그저 답답하고 괴로웠던 순간만 계속되자, 더 이상 이 회사를 다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퇴근하고 나면 채용공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여름날에 채용시장은 너무나 추웠다.
지원할만한 곳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어디든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관심 없었던 기관의 계약직을 지원했다.
기사자격증 4개와 한국사 1급, 토익 800점대의 스펙이 있었던 나는 서류는 무조건 통과할 거라고 믿었다.
면접도 무슨 일이 있어도 붙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드디어 서류 발표날이 되었다.
그런데, 오후 5시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서류 발표가 나지 않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지원했으면 불합격 통보라도 받는 게 맞을 텐데, 어떻게 아무런 통보도 없는 걸까?
사기업도 아니고 공공기관에서 이렇게 통보도 없을 수가 있나?
이상함을 느낀 나는, 지원했던 이메일을 한 번 확인했다.
아뿔싸, 채용 담당자 이메일을 잘못 적어서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아예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서류 발표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퇴근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발견한 이 멍청함에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실성한 것처럼 웃음만 나왔다.
허탈함에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가까스로 퇴근한 뒤에 나는 방구석에서 미친 듯이 웃었다.
흡사 조커처럼 말이다.
비극과 희극이 섞인 듯한 이 난잡한 웃음이 끝나자, 이제는 눈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눈물도 끝날 무렵, 나는 거의 체념한 채 다른 채용공고가 뜰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자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렇게 다시 하루하루 버텨가던 7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후배가 돌려준 민원 전화를 받게 되었고, 그 전화를 받게 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퇴사를 하게 된다.
그 전화는 다른 부서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어느 민원인의 전화였다.
단순히 욕하고 짜증만 내는 사람이 아니라, 허점이나 꼬투리를 잡아서 집요하게 물어지는 사람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을 가정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버거웠던 사람이었다.
"이 사업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관리자분도 아실 텐데, 이것을 법적으로 의무화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돌려서 답변하면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다시 질문을 하는 사람.
그 질문이 잘 전달되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악성 민원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처음에 50분 동안 통화를 하였고, 두 번째에는 40분 넘게 통화를 하였다.
욕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짜증과 비꼼이 난무하는 대화에서 나는 일방적 폭행을 당했다.
그 민원인에게 나는 쓸데없는 사이트와 법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사용하라 가정하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에서야, 이러한 민원에 그냥 원칙적인 답변만 하고 끊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통화를 끝내고 난 뒤, 내 멘탈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나는 여기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한 달 전부터 회의감에 빠져 있던 나는 이제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까지 욕을 먹으면서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내 가슴을 더욱더 답답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내 신체에도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시 출근하여,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은 나는 몸에 이상이 생긴 걸 느꼈다.
통화가 울리기만 해도,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단순한, 시스템 기능 한 가지만 친절하게 묻는 사람의 전화를 받아도 나는 온몸이 긴장되었다.
'혹시 이 사람이 다른 걸 물어보지는 않을까? 갑자기 짜증을 내지는 않을까?'
전화를 받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고, 전화벨이 울리면 내 심장도 고동치는 듯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1분 1초가 너무나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옥같이 하루를 버티고 나면, 집에서는 숨만 간신히 쉴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저절로 눈물이 났고, 아침에는 그냥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가 울리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더 이상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지경까지 오고 나니, 나는 이제 직감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내가 퇴사를 해야 할 때구나.'
평소에 친했던 행정 담당 대리님께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다가가 말씀드렸다.
"대리님. 몸이 안 좋아서, 이번 주중으로 퇴사하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린 거였는데, 대리님이 편의를 참 많이 봐주셨다.
대리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나는 남은 연차를 바로 다음날에 썼다.
남아 있던 연차를 쓰고 나서 복귀하니, 퇴사처리가 거의 다 끝나있었다.
남은 것은 내 짐을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연차를 쓰고 돌아온 출근 마지막 날.
그날도 오후 반차를 썼기에, 오전 업무만 끝나고 나는 점심시간에 작별을 하게 되었다.
급하게 들고 온 쇼핑백에 슬리퍼와 내 짐들을 쑤셔 넣은 뒤 인사도 거의 하지 않고 뛰쳐나왔다.
그렇게, 내 첫 회사생활은 5개월 만에 정말 싱겁게 끝이 났다.
당연히 사유는 자진퇴사였고, 이 자진퇴사 하나 때문에 나는 다른 면접에서 곤욕을 치르게 된다.
7월의 오후는 햇살이 정말 눈부셨다.
건물 밖을 나오자마자, 내 답답했던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뻥 뚫려버렸다.
너무나 상쾌했던 나는 횡단보도를 건넌 후 내가 근무했던 건물을 뒤돌아봤다.
작고 낡은 상가를 임대해서 썼던 우리 사무실은 새삼 초라해 보였고 무정했다.
겨우 저 정도 건물 속에서, 내가 그렇게나 힘들어했구나.
새삼 내가 초라해졌지만, 알게 뭔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최대한 빠르게 회사에서 멀어져 갔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집을 구했던 나는 금방 집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더욱더 안락하게 느껴진 침대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으니 그간의 일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신기하게도, 안 좋았던 일들보다 좋았던 일들이 먼저 떠올랐다.
워크숍에서 동기들과 양꼬치에 맥주를 먹었던 날들, 동기들과 같이 스터디하던 날들.
서로 열띤 토론을 하면서 업무를 하던 날들.. 갖가지 좋았던 일들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내가 일단 살고 봐야 좋았던 일들도 추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안락한 침대 속에서, 나는 첫 회사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생활비가 없었기에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일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다가오는 신용카드 결제대금과 향후 미래계획, 앞으로의 커리어 등등은 모두 제쳐뒀다.
그래도 계약직이나 다른 인턴은 또 금방 합격할 수 있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자신감으로 7월의 남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하며 7월을 마무리했다.
그때는 9월 말까지 다른 의미의 마음고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은 정말 금방 흘러갔고, 8월이 된 나는 초조해졌다.
지원할만한 그 어떤 채용공고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정말 무더웠지만 채용시장은 겨울이었다.
사기업도 이렇다 할 채용공고가 없었고, 공공기관은 더욱 그랬다.
정규직은 몰라도 계약직이나 인턴은 지금 쯤 떠야 하지 않나?
작년의 채용공고 시기를 봤을 때는 뜨고도 남은 시기였다.
설마, 올해는 안 뽑을 수도 있나?
무턱대고 한 퇴사의 무서움이 그제야 뼈저리게 느껴졌다.
더운 여름에도 텅텅 빈 내 통장은 쓸쓸하고 추웠다.
나는 그저 식비를 더 줄이고 집안에만 틀어박힌 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9월까지 어떤 채용공고도 뜨지 않으면, 아르바이트를 바로 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의 나는 기다리는 과정이 참 불안했는지,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동기부여 관련 영상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퇴사 후기 등을 찾아보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어.'
'퇴사를 하면서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린 거야.'
'사람은 잠깐 멈출 때도 필요해.'
그렇게, 9월 말 기간제근로를 시작하는 날까지 나는 퇴사 관련 이야기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브런치스토리를 알게 된 것도 딱 그 시점이었다.
나의 자기 합리화는 8월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한 나만의 처방전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머리는 좀 박혀있었던 나는 8월에 꽤나 생산적인 활동도 하였다.
공공기관 필수 스펙 중 하나인 컴활 1급 자격증을 공부한 것이다.
8월에 채용공고를 기다리는 불안감을 건강하게 해소하기 위한 활동 중 하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공부를 했었으면 좀 더 빨리 취득했겠지만, 그때는 퇴사 브이로그와 에세이를 읽는 즐거움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컴활 1급을 공부했고, 채용공고도 틈틈이 확인했다.
저녁에는 책도 읽으며, 공공기관 필기시험인 NCS도 공부하는 등 너무 답 없는 인생을 살진 않았다.
한심한 백수 같아 보이기도 하다가, 그래도 나름 취업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려는 취준생 같기도 했던 내 삶은 9월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컴활 1급 자격증을 취득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인천의 어느 센터에서 기간제근로 공고가 뜬 것이다.
사무 보조업무였기에, 컴활 1급 자격증이 있는 나는 서류에서 가점을 받아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면접은 홈페이지의 사업 관련 공고와 자료들을 전부 낱낱이 읽고 암기해 간 덕분에 면접관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람이 밥그릇이 걸리면, 정말 별 거 아닌 것도 치열하게 준비하게 되는구나를 그때 느꼈다.
어쨌든, 나는 다행히 9월 말부터는 기간제근로자로 근무를 하게 되며 가까스로 백수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기간제 근로는 3개월간의 짧은 계약기간이었으나, 나는 이 센터에서 정말 행복하게 근무를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기사 자격증을 하나 더 취득하여 5개의 기사자격증을 가지게 되었고, 토익도 다시 880점으로 갱신하였다.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취업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2022년 9월 ~ 2023년 4월의 이 기간은 내 취준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의 직장 경력에는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지만, 내 인생 자체의 경력에서는 꼭 필요한 시기였다.
나는 이 기간 동안에 무너졌던 멘탈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다.
쓸쓸한 가을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풍년이었다.
그 풍요로움 속에서 나는 작가의 꿈을 나지막이 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