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 의기소침하고 죄책감이 깊었나..
2014년 11월 어느 목요일.
열심히 공부한 고3 학생들은 누구나 기쁨을 느낄 수능이 끝난 저녁.
대부분은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을 먹으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날.
나도 가족들과 함께 있었지만, 내 마음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더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공부를 하지 않아서 수능을 망쳤었기에, 어머니를 뵐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면 안 됐었다.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던 내 모습에 그렇게나 기뻐하시던 어머니에게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수능날에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을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나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저, "고생했다. 맛있는 거 먹고 푹 쉬어라."라는 말을 해주셨고, 또 나를 무작정 믿어주셨다.
눈물이 났다.
이렇게 좋은 어머니 밑에서, 왜 나는 공부도 안 하고 그랬던 걸까.
어머니의 따스한 위로를 과연 내가 들을 자격이 있을까.
죄송한 마음에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속으로 삼켜가며, 나는 다짐했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었던 '편입학'을 하기로 말이다.
내 죄책감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편입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은 굉장히 한가로웠다.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기까지, 원래 교육과정에 포함된 수업을 마저 해치우기 위한 형식적인 수업을 하였다.
선생님들조차 의욕이 안 들 정도인데, 학생들은 어땠을까?
다들 다른 짓을 하며 농땡이를 피우기 일쑤였다.
공부를 잘했던 애들은 벌써부터 대학교재를 미리 사서 선행하기도 했지만.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고 나서는, 현장체험 학습 같은 것을 시작했다.
그냥 학교 주변 공원이나, 명소들을 다니며 구경하고 오후에 마치는 식이다.
반 친구들은 각자 흩어지기 전에 약속을 잡고 더 놀러 다녔지만, 나는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했지만, 나는 사실 돈도 딱히 없었고(용돈은 3만 원이었다) 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얼마 안 되는 현장체험 학습기간도 끝나자, 바로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2월 말의 졸업식까지 약 두 달 남짓한 기간이 주어졌는데, 나는 바로 공장 알바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학 등록금은 소득분위가 낮았기에 장학금으로 어떻게 해결이 될 거 같았고, 1학기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장 알바를 알아본 이유는, 내가 사는 동네가 약간 촌동네라 그런지 알바 자리도 얼마 없었고 그 마저도 여자 알바를 뽑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 아무래도, 빵집이나 커피집, 음식점 같은 곳들이 좀 많다 보니 여자를 더 선호하는 거 같았다. 남자였던 나는 이쪽 직종으로는 알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사는 동네는 공장단지가 밀접한 곳이 있어서 그런지 남자는 그쪽으로 수요가 많았다.
교차로 신문에는 공장 구인광고가 차고 넘쳤다.
나는 거기서 딱히 별생각 없이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지원하였다.
내 기억상으로는 그냥 전화를 해서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가볍게 면접 한 번 보러 오라고 했던 것 같다.
가볍다고 한 이유는, 그 면접이 정말 형식상 뿐이었기 때문이다.
약간 풍채 좋은 사장님이 나오셔서 정말 가벼운 질문들만 했고,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다른 친구들이 졸업여행을 다니거나 고등학교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시기에, 돈을 벌러 공장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내 죄책감의 일부나마 덜어내기 위해서.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회로 진출한 경험.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악덕한 사장을 만나서 임금이 체불되거나 가스라이팅을 당하여 심신이 피폐해졌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일절 없었다. 약간 거친 분이시긴 하셨지만, 교묘하거나 사람 속을 썩이는 그런 타입은 아니셨다.
그냥 좀 화끈하셨다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겠다.
불같이 화를 내실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나한테 그러지는 않았다.
근무하시는 다른 아주머니 분들이나, 남자 과장님한테만 화를 내셨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한테 화를 안 낸 이유는, 딱 봐도 고등학교 졸업해서 곧바로 일하러 온 애처럼 보여서였을까?(나는 꽤나 동안이다) 아니면, 내가 그래도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착실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라 딱히 화 낼 이유가 없어서였을까?
어쨌든, 월급을 받는 조직생활을 첫 사회생활이라고 칭한다면 나는 꽤나 좋은 곳에서 시작한 편이었다.
하지만 첫날 출근은 딱히 운이 좋진 않았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공장의 화장실에 잠깐 들르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액정이 다 박살이 나버렸다.
다행히, 튼튼하기로 소문났던 갤럭시 S2를 썼어서 그런지 박살이 나도 핸드폰은 잘 되긴 했다.
내 마음은 약간 금이가 버리긴 했지만.
내가 근무하게 될 단지로 가보니, 생각보다 공간이 되게 넓었다.
출하해야 될 물품들이 곳곳에 쌓여있었고, 조립라인들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약간 길 잃은 미아처럼 서성거렸더니 과장님이 오셔서 사장님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방에서 사장님에게 회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나는 바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물품은 자동차 위에 물품을 싣게 해주는 작대기 같은, '루프랙'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나는 양 끝에 커버 같은 것을 씌우고, 못을 박아서 조립하는 파트였는데 이 커버가 스크래치 안 나게 고무 판 같은 곳에 올리고 천장에 달려있는 기계를 이용해 못을 끼우면 되었다.
생각보다 되게 간단한 조립이었지만, 못을 끼우는 기계에 손가락이 잘못 걸리면 확 돌아서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컨베이어 식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뢰가 들어온 만큼 수량에 맞춰 생산하면 되어서 내가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었다.
오전에 정신없이 일을 하고 나니, 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첫날 점심이라 그런지, 사장님이 밖에서 김치찌개를 사주셨다.
처음으로 일하고 먹은 점심이라 그런 거였을까? 아직도 기억날 정도로 굉장히 진하고 맛있었던 맛이었다.
간단하게 먹은 후, 휴게실에서 잠깐 쉬다가 다시 근무를 시작했다.
조립 업무가 워낙 간단했어서, 하루 만에 작업은 손에 익었다.
문제는 시간이 정말로 안 간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 체감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시계를 보면 20분이 지나가 있는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시간의 흐름.
이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하기 위해선, 시계를 안 보는 게 상책인걸 나는 이때 깨우쳤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시계를 안 보니 진짜로 시간이 빨리 흘렀는데, 4시가 되자 사장님이 야간에 잔업할 인원을 모집하기 시작하셨다.
나한테는 딱히 물어보진 않으셨지만, 나는 내가 자진해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잔업 수당을 쳐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약간 놀라셨지만, 그래도 내 젊음의 패기를 믿어주셨는지 2시간 정도 잔업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첫날은 그렇게 저녁 8시가 돼서야 퇴근하고 집에 가게 되었는데, 집에 가자마자 나는 바로 쓰러져서 잠들었다.
사실 이 첫날의 기억 말고는, 다른 날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반복이었고, 사장님부터 해서 직원분들이 모두 나한테는 친절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이 봐주시고 배려해주셨구나 싶다.
나는 덕분에, 첫 사회생활을 이상한 편견 없이 좋은 기억을 가지고 마치게 되었다.
중간에 끼어있던 명절까지 보너스를 챙겨주신 덕분에, 나는 그 당시 시급이 5580원이던 시절에 3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모으고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015년 3월.
청춘의 시작이자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활이 눈앞에 있었지만, 나는 그런 청춘을 즐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편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편입 때문에, 나는 누구와도 어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의 대학 1학년은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내 삭막한 청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