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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Oct 12. 2024

제11화. 첫 번째 멘토, 아버지!

  옛날에 할머니께서 나이만큼 인생의 속도가 지나간다더니,  환갑을 지나니 정말로 가속도가 붙었는지 하루가 금방 금방 지나간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일들이 그림처럼 지나간다.    

  

아버지! 

든든한 우리들의 울타리. 슈퍼맨 우리 아버지!   

우리 6남매 형제들에게 특히 세 딸들에게는 너무나 큰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성실과 노력, 의지의 화신인 우리 아버지!     

      

  내 어렴풋한 기억 속에는 율세동 큰 회나무 아래 방 두 칸짜리 우리 집. 우리 6남매, 막내 삼촌, 오빠들 어떻게 공부시키고 생활했을까? 

지금도 생각 나는 일. 부모님께서 처절하게 번갈아가며 투병하시며 대도시의 병원에 계셨을 때, 대학생으로부터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은 삶과 부대끼며 훗날 인생의 지혜가 된 용기를 배우고 있었다.      

병원비로 오르간 TV를 다 팔고, 새로 이사한 신안동 집에서 저녁마다 상 위에 우리 형제들이 둘러앉아 공부를 하며 서로 웃고 서로 울곤 했었다. 큰언니는 휴직하신 아버지의 봉급을 타서 쌀을 사서 30 봉지로 나누었다. 보리쌀을 많이 삶아서 넣고 쌀은 거의 섞지 않았지만 얼마나 꿀맛이었던가! 

동생과 나는 언니 오빠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더 먹으려고 다투곤 했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었지만, 큰언니는 조부모님 상을 차려드리고 헐레벌떡 뒷산으로 가로질려 여고로 정신없이 뛰어가곤 했다.      

훗날 아버지께서는 책임감 있고 마음씨 착한 큰언니가 한창 자랄 때 못 먹어서 키가 제일 작고 집안 생각해서 교육대학만 졸업했다고 늘 마음 아파하셨다. 

  그 당시 물론 힘은 들었겠지만 그 시련이 우리 형제들의 우애를 깊게 만들었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많은 가족이기 때문에 장학생이 아니면 상급학교에 갈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모두들 서로 물어가며 공부했다. 

투병 생활은 오래도록 길었지만, 그동안 우리들의 마음은 단단해졌고 나는 어린 마음에 과외받는 친구가 부러워 책을 쓰신 저자께 편지를 썼다. 다행히 그분으로부터 영어 테이프를 받게 되었고, 그것은 내가 영어 교사가 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분이 내게 베풀어 준 은혜를 또 나의 학생들에게 갚게 해 주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땅의 모든 장남들처럼 효도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비록 장남이지만 양자로 가셔서 친가, 양가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하시고 삼촌 고모들도 출가시키셨다. 조부모님 결혼 60주년 회혼례를 올려 드렸으며 한의원을 하신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빚을 허리가 휘어져라 일을 하셔서 갚으셨고,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누워계실 때 대소변을 받아내며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셨다.

대학교 때 학생회장을 한 막내 삼촌의 해외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픈 다리를 절며 나가시던 무거운 짐에 눌린 그 뒷모습. 사업의 흥망성쇠가 심했던 둘째 삼촌이 한 번씩 오셨을 때 뒷 처리 하시느라 힘들던 모습.  가슴 아리게 기억되는 모습들이다. 철없는 마음에 우리들의 등록금을 한 번도 삼촌들이 내어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었다.      


은혜는 베푸는 것이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는 아버지의 말씀을 애써 위로로 삼았으나 당시에 우리 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작은 오빠가 어쩔 수 없이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해서 허리를 다쳤을 때 우리들이 울었던 눈물은 정말로 피보다 더 진했었다.  

   

아버지의 가장 훌륭하신 점은 절망하시지 않는 용기다     

  식목일 날 직원들과 산에서 나무를 심다가 굴러 떨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다쳐 관절염을 앓게 되셨다. 

여러 병원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중병선고를 받고서도 한 번도 “내가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조차 해 본 일 없이 강한 정신력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이겨내셨다. 어머니 또한 암으로 대수술을 받으시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셔서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와 주셨다. 

비록 완쾌는 덜 되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 집에 오셨지만 환하게 웃은 그날 저녁의 기쁨이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끝없이 대출을 받아서 황소처럼 밤낮으로 일하셔서 갚으셨다. 우리 6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좋은 직장인으로 성장, 결혼까지 시켜 주셨다. 

공직에서 퇴직하신 후에도 일손을 놓지 않고서 진갑을 넘기신 나이에도 그 당시 유행하던 빨간 벽돌집을 장기대출을 받아서 짓는 용기!      

“너희들 공부 안 시켰으면 옛날에 집 짓고 너 엄마도 호강시켜 주었을 거다.” 칠순을 넘기신 나이에 호주에 여행 가셔서 번지점프에 도전하셨다. 또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하시고, 팔순을 넘기시고도 매주 도립 도서관에서 치매 예방이라며 3권씩 꼭 책을 대출받아 읽으셨다.

결코 부자가 아니지만 주눅 드는 법이 없으시고 아버지 말씀처럼 대출인생이지만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여유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릴 때 겪은 가난은 결코 형제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고오히려 그러한 아버지의 헌신과 교육열이 오늘날 우리 형제들이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잔정이 많으셔서 세 딸들의 첫 교직 발령지에 아버지께서 손을 잡고 데리고 가 주셨다. 큰언니는 첫 딸이어서 초등학교 입학 때 레이스가 달린 노란 원피스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고 사진관에서 입학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언니는 아버지께서 처음 출근한다고 시내 수입 양품점에서 수제 구두와 비싼 네이비색 핸드백을 사 주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퇴원해서 집으로 오신 부모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내 생일을 한 번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아침에도 식구들 아무도 모르고 저녁에도 미역국이 없자 내가 서운해서 골목에서 아버지랑 일대일 상담하며 항의하며 떼를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결혼 후에도 내 생일에 ‘금일봉’이라고 봉투에 써서 3만 원씩 봉투에 넣어서 매년 주셨다. 생신이나 집안행사 시 아버지는 솔직 담백하셔서 참 좋다. 전화를 걸어서

“향아! 너 예산이 얼마 있노? 그래? 그러면 나는 이것 사 다오. 이것이 먹고 싶다. 아니면 이것 사고 싶다.”

라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편안하고 좋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이 땅의 평범한 보통 아버지시다.  너무나 전형적인 K-장남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너무 위대하신 태양이다. 아버지 몸 군데군데의 훌륭한 훈장들을 우리 형제들은 기억하고 사랑한다. 

관절염으로 인해여기저기 쑥뜸을 한 크고 검은 훈장들당뇨병으로 인해 마르신 몸칠순을 훨씬 넘어서 백내장 수술을 하신 축 처진 양쪽 눈젖가슴 밑의 크고 붉은 점까지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굵게 패인 주름살과 빛나는 훈장들은 오래오래 우리 형제들의 가슴속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정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아버지께 살아계실 때 한 번도 직접 말로 표현한 적이 없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버지!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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