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어느 여름날,
“따르릉! 따르릉! 네, oo 요양센터입니다.”
“저기 오늘 병문안 가능한가요?”
“죄송합니다. 보호자님! 아직 메르스 종식 선언이 안 되어 우리 요양센터는 곤란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보호자님 휴대폰으로 안내 문자가 나갈 것입니다.”
벌써 엄마를 못 뵌 지 두 달이 다가온다. 지난 7월 1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만 5년째 기일이다.
각지에 흩어져있는 형제들이 메르스 때문에 아버지 산소에도 못 오고 엄마한테 병문안도 못 갔다. 아직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나 큰데, 가끔씩 책장 위의 빙그레 미소 짓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욱 생각난다. 아버지께서는 말년에 거동이 불편하셔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87세로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일기를 쓰시고 역사 소설을 즐겨 읽으셨다. 일기라야 간단한 가계부와 그날 하신 일, 느낌을 간략하게 쓰셨는데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몇십 년 동안 쓰신 일기장을 보았다.
아버지께서 무슨 종이를 들고 오시더니 “이제 두고 보거래이. 너 엄마는 걱정 없데이. 내가 다 알아서 잘해 놓을 구먼.”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처음 도입되는 국민연금 안내장이었다.
안내장을 보시며 아버지께서 “미래를 위해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이런 것은 정부를 믿고 해야 된데이. 내 친구들은 안 믿고 안 하지만 나는 한데이. 두고 보거래이, 나중에 덕 볼 날이 있을 것이다.”하시며 엄마 이름으로 넣는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 한시적으로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넣을 수 있다며 삼만 원도 안 되는 돈을 오 년만 넣으면 일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아버지께서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을 볼 때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이 땅의 장남들이 다 그러하듯이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삶을 사셨다. 아버지께서는 강직하고 청렴하신 성품으로 당신께서는 스스로 ‘대출인생’, ‘오뚝이 인생’이라고 즐겨 말씀하셨다. 우리 육 남매. 삼촌, 사촌 오빠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공납금 낼 때마다 대출해서 납부하고 거의 칠순이 되실 때까지 밤낮으로 일하셔서 대출을 갚으셔서 ‘대출 인생’이라고 하셨다.
교육에 높은 열의가 있으셔서 공부만은 꼭 시켜야 한다며 딸, 아들 구분 않으시고 대학까지 보내 주셨다. 각자의 이름으로 된 공책에 공납금을 납부할 때마다 영수증을 붙이시며 “내가 너희들 공부하는데 투자한 거데이. 너희들 이것 다 나중에 갚아야 된데이.” 하시며 우스개처럼 말씀하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두꺼워지는 영수증 공책을 보며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사십 대 한창의 나이 때 식목일 산에 나무 심으러 가셨다가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치셔서 일어나지도 못하셨다. 대구 큰 병원에서 무려 2년을 계셨고 병구완하시던 엄마마저 큰 병을 얻어서 2년을 더 병원에 계셨다. 초, 중, 고에 다니던 형제들이 사춘기 시절을 보낼 때 부모님의 부재는 무척 힘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열심히 공부했다. 오빠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에 갔고, 큰 언니가 매일 아침 조부모님 밥상을 차려드리고 여고 뒷산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는 병구완에 지치시고 큰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너무 절망적이어서 옥상에 올라가서 나쁜 생각도 들었다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다 키우고 공부시켜야지.’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시고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나셔서 ‘오뚝이 인생’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요양병원에서 3년 8개월을 투병 생활하실 때 매일 엄마는 정성껏 반찬을 해서 문병을 가셨다. 우리들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엄마가 자유롭게 놀러 다니시고 잘 지낼 줄 알았는데 그만 정신줄을 놓으시고 고관절을 다치시게 되었다. 거동이 불편해지자 엄마마저 병원에 계시다가 요양센터로 가시게 되었다. 가끔 엄마의 외출을 위해 옷을 가지러 친정 빈집에 들어갔을 때 국민연금에서 날아온 납부 안내장을 보았다.
엄마가 가입한 연금은 특례노령연금으로 월 보험료 29400원으로 1995년 7월부터 60개월 오 년 동안만 납부했다. 납부한 금액이 75만 정도인데 엄마가 받은 금액은 1980만 원이 넘는다.
엄마가 병원비를 낼 때마다
“병원비 비싸지? 많이 나왔지? 왜 빨리 아부지가 안 부르는지 모르겠다.”
라며 걱정하실 때 나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엄마! 아프시더라도 엄마가 살아계신다는 것이 난 정말로 행복해. 아부지가 엄마한테 준 선물이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국민연금 이게 있으니 엄마가 얼마나 든든해요!”라고 말씀드렸다.
방실방실 웃고 상냥해서 요양보호사들이 좋아하셨던 우리 엄마!
처음에는 울었지만 나중에는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웃으시던 우리 엄마!
착한 치매를 앓으셔서 요양센터에서 착한 할머니라고 불리던 우리 엄마!
올해 여름에도 장마철이 올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외출할 때 우산이 필요한데 살아생전 우리 엄마는 걱정이 없었다. 뒤에서 아버지가 받쳐 준 국민연금이라는 든든한 우산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