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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로마, 천 년의 흔적을 따라

by 이자까야 Mar 12. 2025
콜로세움콜로세움


로마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천 년의 시간을 마주하다


비행기가 착륙을 알리며 천천히 활주로를 달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따뜻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나는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오랜 역사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탈리아어, 이국적인 손짓과 표정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커피와 오래된 돌길의 향기까지.


"드디어 로마에 왔다."


입국장에서 나오는 순간, 로마의 공기가 내 피부에 와닿았다.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수천 년 전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공간.


1일 차: 고대 로마 속으로


콜로세움, 천 년의 시간을 걷다


아침 햇살이 로마의 거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공기가 아직 서늘한 이른 시간, 나는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거리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침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정말 눈앞에 있는 현실일까?"


책에서, 영화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감동이었다.


콜로세움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로마의 심장이었다.


거대한 돌기둥 앞에서 멈춰 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경기장의 규모가 더욱 실감 났다.


거대한 석조 기둥과 수백 개의 아치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구조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도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검투사들이 목숨을 건 싸움을 펼쳤을 것이다. 황제와 귀족들이 높은 자리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며 환호했을 것이고, 수만 명의 로마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광경을 지켜봤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콜로세움의 차가운 돌벽을 만져보았다.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이 돌에는, 로마 제국의 영광과 잔혹함,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거대한 원형 무대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관중석이 반원형으로 층층이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깊이 파인 지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곳에서 정말 사람들이 싸웠을까?"


콜로세움의 중심에는 예전의 검투사들의 무대(Arena)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닥이 사라지고, 그 아래 감춰져 있던 지하 미로(Hypogeum)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에는 과거의 검투사들이 대기하던 방, 야수를 가두던 공간, 그리고 지하에서 무대로 올라가는 비밀 통로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을 내려다보며, 상상해 보았다.


2000년 전, 이곳에서 싸움을 기다리던 검투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곳에 서 있었을까?


나는 천천히 계단을 따라 위쪽 관중석으로 걸어 올라갔다.


로마 시민들이 앉아 경기를 관람했던 자리, 황제와 귀족들이 앉았던 높은 자리가 저 멀리 보였다. 그곳에서 바라본 콜로세움의 풍경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비록 시간이 흘러 경기장의 일부는 허물어졌지만, 이 공간을 가득 채웠던 함성과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콜로세움은 단순한 돌더미가 아니었다. 이곳은 과거가 숨 쉬는 공간이었고,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콜로세움을 지나, 나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했다. 콜로세움이 로마의 위대함을 웅장하게 보여주는 곳이라면,

팔라티노 언덕(Palatino)과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로마가 걸어온 시간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입구를 지나 언덕을 오르는 길은 조용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콜로세움과 달리, 이곳은 한결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돌길을 따라 걷다 보니, 눈앞으로 로마 제국의 흔적들이 하나둘씩 펼쳐졌다.


팔라티노 언덕, 로마 황제들의 기억이 서린 곳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가 시작된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이곳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고, 결국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이야기를 떠올리며 언덕을 오르니, 그 옛날 로마 황제들이 살았던 궁전의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지고 일부 벽과 기둥만 남아 있었지만, 한때 이곳이 얼마나 화려한 궁전이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발길을 옮겨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로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콜로세움이 보였고, 아래쪽으로는 포로 로마노의 유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부드럽게 로마를 감싸고 있었고, 바람은 천 년의 흔적을 따라 부드럽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로마의 황제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 도시를 내려다보았을까?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붉은 노을이 이 도시를 물들일 때, 그들도 나처럼 이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을까?


포로 로마노, 로마의 중심을 걷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와 포로 로마노로 들어서니, 마치 거대한 야외 박물관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한때 로마의 정치, 경제, 종교, 모든 것이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로마의 심장이 뛰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그 화려했던 흔적들만이 남아 있었다.


기둥만 덩그러니 서 있는 신전들, 무너진 아치와 바닥에 널린 대리석 조각들, 이곳이 한때 얼마나 번영했던 곳인지, 어렴풋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로마의 따뜻한 햇살이 오후를 비치고 있었다. 포로 로마노의 유적들은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물들었고, 하늘과 맞닿은 오래된 돌들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 보였다.

나는 돌계단에 앉아 마지막으로 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수천 년 전, 이곳을 오갔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했다.


포로 로마노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영광과 쇠락을 모두 품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나는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꼭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도시는 한 번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로마의 황혼 속에서 그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진실의 입, 로마의 전설 속으로 손을 뻗다


로마를 여행하며 가장 설레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는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순간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à) 앞에 서는 순간,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전설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오래전, 한 편의 영화 속에서였다.


진실의 입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바로 1953년 개봉한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덕분이었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클래식한 흑백 화면 속에서, 아름다운 공주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그레고리 펙이 함께 로마를 여행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 바로 그레고리 펙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손이 잘린 척하며 오드리 헵번을 놀라게 하는 순간!


헵번의 깜짝 놀란 표정,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은 영화 역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Santa Maria in Cosmedin)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 입구를 지나 안뜰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기둥을 배경으로 자리한 거대한 원형의 대리석 조각, 그리고 중앙에 크게 뚫린 입 모양이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진실의 입은 원래 고대 로마의 분수 장식이었거나, 하수구 덮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조각상을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자의 손을 물어버리는 신비한 입으로 여겼다.


"과연, 내 손을 넣어도 괜찮을까?" 영화 속 장면처럼, 나도 손을 조심스럽게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럽지만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이 순간, 나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로마의 전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을 말하는 자의 손을 물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거짓 없이 살아왔나?" "이곳에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물론 손이 잘릴 리는 없었지만, 이 작은 장난 같은 순간이 신기하게도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손을 빼내고 나니, 주변에 있던 여행자들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넣었고, 누군가는 친구를 놀리며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진실의 입은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었다.


이곳은 로마를 찾은 사람들이 잠시 유쾌한 긴장감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다시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로마에는 크고 웅장한 유적도 많지만, 이렇게 작지만 영화 같은 순간을 만들어 주는 장소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진실의 입에서 손을 넣고, 순간의 감정을 기록한 이 순간도 내게는 로마에서의 잊을 수 없는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로마를 찾게 된다면, 나는 또다시 진실의 입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손을 넣으며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2일 차: 로마의 르네상스를 마주하는 날


트레비 분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아름다운 곳


아침 이른 시간, 아직 로마의 거리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 나는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이곳은 언제나 사람이 가득한 곳이지만,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는 비교적 조용한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갑자기 눈앞에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분수가 등장하는 순간.


"아, 드디어 왔다."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트레비 분수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무대 같았다.


중앙에는 바다의 신 네푸투누스(Neptunus)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 주변을 둘러싼 조각들은 로마의 신화와 역사를 담고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 잔잔하게 흔들리는 푸른 물빛, 그리고 햇살이 닿아 반짝이는 돌조각들.


이곳은 단순한 분수가 아니라, 로마의 낭만과 전설이 담긴 장소였다.


나는 천천히 분수 앞에 섰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등 뒤로 동전을 던졌다.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로마에서 사랑을 만나며,

세 번 던지면 로마에서 결혼한다."


나는 이미 세 번이나 로마에 왔다. 하지만 여전히 다시 오고 싶은 도시였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이 로마를 다시 찾게 하는 마법이라면, 나는 이미 그 마법을 경험한 셈이었다.


처음 로마에 왔을 때는 2006년 여름, 이탈리아가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한 날이었다.


나는 그날 밤, 로마의 거리를 걸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면을 마주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고,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으며, 어디선가 "Forza Italia!"를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갑자기 트레비 분수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정말 저기 들어가는 거야?"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트레비 분수 속으로 뛰어들어 월드컵 우승을 온몸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축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환희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의 트레비 분수는 로마의 낭만이 아니라, 열정과 광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로마의 시간을 느끼다


트레비 분수를 뒤로하고, 나는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으로 향했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이 있는 곳,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로마의 햇살을 즐기는 공간.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나는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로마의 일상이 스며든 장소라는 걸 느꼈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료를 마시며 웃고 있었으며, 어딘가에서는 기타를 치는 거리 음악가의 노래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로마의 거리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곳이 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바쁘게 걷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를 급하게 향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판테온, 영원의 빛이 머무는 곳


로마에는 수많은 유적이 있지만, 판테온(Pantheon)은 조금 특별했다.


콜로세움처럼 웅장한 경기장도 아니고, 바티칸처럼 거대한 성당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감동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까지,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켜온 완벽한 돔.


나는 그곳에서 영원을 마주했다.


처음 판테온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놀랐다. 거대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그 뒤로 둥글게 이어지는 웅장한 돔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소박한 외관. 하지만 이 단순함이야말로 판테온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2000년 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재건한 이 신전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로마 유적이다.


'영원한 신들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 나는 조심스럽게 그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완벽한 원형의 공간.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하늘을 향해 뚫린 거대한 원형 창.


"이게 정말 인간이 만든 건축물일까?"


돔의 꼭대기에는 오큘러스(Oculus)라고 불리는 거대한 개방형 창이 있었다. 창이 아니라, 하늘과 직접 연결된 창문처럼 보였다.


판테온 내부에는 인공조명이 없다. 오직 저 하늘에서 쏟아지는 자연광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아침과 저녁, 계절과 날씨에 따라 이 공간을 비추는 빛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 순간, 둥근 돔을 타고 빛이 흘러내리면서 벽과 바닥,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나는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이곳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이곳에서는 누구도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없다.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 모든 것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듯했다.


돔을 지탱하는 거대한 벽, 균형 잡힌 대리석 기둥, 천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이 구조.

현대의 기술로도 완벽하게 재현하기 어려운 건축물.


그리고 이곳에는 한 사람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


라파엘로(Raphael).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 그리고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로마를 빛낸 예술가."


판테온 한쪽 벽에 자리한 그의 무덤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지금도 이 도시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곳에 묻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을까?

아니면, 로마가 그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내어 준 걸까?


나는 조용히 그의 무덤을 바라보며, 그가 살아있을 때의 로마를 상상해 보았다.


밖으로 나와 다시 한번 거대한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2000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건축물. 하늘과 연결된 신비로운 빛. 그리고 그 안에 잠든 예술가들.


나는 깨달았다. 이곳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영원’이라는 개념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낸 공간이라는 것을.


비록 나는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자에 불과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판테온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로마에 온다면, 나는 또다시 이 문을 밀고 들어가, 돔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잊을 것이다.


판테온이 그러하듯, 내 기억 속에서도 이곳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3일 차: 바티칸에서 예술과 신앙을 만나다


바티칸 미술관,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예술의 성전


로마에서 바티칸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순례자처럼 위대한 예술을 마주하러 가는 여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여정의 첫 번째 관문은 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림이었다.


아침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바티칸 미술관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관광객, 미술 애호가, 학생들, 그리고 나처럼 설렘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며, 저 거대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은 길었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티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들이 모인 곳. 눈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기다림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예술의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로 마주한 곳은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이었다.


여기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장과 벽이 온통 그림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안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예술의 중심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앙에서 대화를 나누고,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유클리드가 각자의 철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라파엘로가 이 모든 철학자들의 얼굴에 동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담아냈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 그리고 한쪽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 그 인물의 얼굴은 바로 라파엘로 자신이었다.


이 그림이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지성인과 예술가들이 한 곳에 모인 시간을 초월한 회합이라는 사실에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벽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 서 있다.


바티칸 미술관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마지막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이다.


조용히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미켈란젤로가 창조해 낸 하늘을 마주했다.


천장 한가운데, 빛과 색이 살아 있는 거대한 프레스코화, ‘천지창조(Creazione di Adamo)’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나님이 손을 뻗어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

두 손끝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그 찰나의 순간.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신과 인간의 경계선, 그 절묘한 긴장감.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삼키며, 나는 천천히 그 천장을 따라 걸었다.


이곳은 단순한 성당이 아니었다. 이곳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거대한 우주였다.


한 붓 한 붓, 그가 직접 그려 넣었을 수천 번의 움직임을 상상하니, 그의 손끝이 닿았던 저곳에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성당 한가운데 서서, 그저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랜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이었다.


미술관을 나오는 길, 나는 다시 한번 바티칸의 높은 성벽을 바라보았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다빈치...


여기에는 수백 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순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눈으로, 마음으로, 온몸으로 경험했다.


이곳은 그저 미술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영원한 예술이 머무는 곳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바티칸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아마도, 이곳을 한 번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또다시 이 성벽을 지나, 그 천장을 올려다볼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바티칸 미술관을 지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바티칸 미술관을 나서는 순간, 나는 여전히 그곳의 강렬한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라파엘로의 방,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예술과 신앙의 흔적들.


하지만 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미술관의 감동을 품은 채, 바티칸의 심장부,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단순한 성당이 아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이자, 로마의 영혼을 품고 있는 공간.


성 베드로 대성당, 문을 통과하는 순간, 성당 입구로 향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이었다.


광장을 감싸듯 늘어선 284개의 원형 기둥, 그 위를 지키는 140명의 성인 조각상들. 이 모든 것이 로마 교황청의 중심이자, 전 세계 신자들을 품는 거대한 품처럼 느껴졌다.


성당 앞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웅장한 돔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성당 안쪽 한 편에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몸을 부드럽게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슬픔이 가득하지만, 고통을 초월한 듯한 표정. 그녀의 손끝에서, 예수의 차가운 육신에서, 나는 묵직한 감정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24살의 미켈란젤로가 만든 작품이란 말인가?"


어찌 보면 단순한 조각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과 신앙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피에타 앞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그저 그 순간을 마음속에 새겼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바티칸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의 감동은 어떤 설명으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나는 성당의 내부를 천천히 걸으며 웅장한 제단과 조각들을 감상한 후, 마지막으로 돔 전망대(Cupola del San Pietro)에 오르기로 했다.


551개의 계단. 좁고 구불구불한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에서 마주한 풍경은,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로마다."


돔 위에서 내려다본 성 베드로 광장. 그리고 그 광장이 거대한 ‘열쇠’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나는 온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겼다는 성경 속 이야기처럼, 광장은 거대한 원형과 두 개의 반원형 기둥이 맞물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로마의 전경.


수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붉은 지붕들과, 멀리 보이는 콜로세움, 판테온, 나보나 광장. 로마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로마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돔에서 내려와 다시 성당을 걸으며, 나는 이곳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이곳은, 단순한 예배 장소를 넘어 신앙과 예술, 역사와 철학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어쩌면 이 성당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은, 광장에서 교황이 등장할 때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온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보기 위해 광장을 가득 메우는 날, 그들은 단순한 군중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으로 연결된 인류가 된다.


나는 비록 교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성당 안에 가득한 숭고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앙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찾는다.


로마를 떠나며, 시간 속에 남겨진 나의 조각들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 도시와 이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조용한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처음 콜로세움을 마주했을 때의 벅찬 감정.

팔라티노 언덕 위에서 로마의 황제들이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던 순간.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다시 올 수 있기를 소망했던 날.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함 속에서 느낀 숭고함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마치 내 일부가 로마에 남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마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랐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걸을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공간이었다.

어디를 가든, 내 발밑에는 수천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돌담 하나에도 이야기가 스며 있었다.


"로마에서는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다."


판테온의 완벽한 돔 아래에서, 포로 로마노의 폐허 사이에서, 바티칸 미술관에서 예술과 마주했던 순간마다

나는 시간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과거가 단순히 흘러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잠시 스쳐 가는 여행자였지만, 이 도시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남겼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창밖으로, 도시의 마지막 풍경이 천천히 멀어졌다.


저 멀리 트라스테베레의 따뜻한 불빛, 테베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오래된 다리들, 그리고 붉게 물든 저녁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그 순간, 나는 다시 트레비 분수를 떠올렸다.


분수 앞에서 등 뒤로 던졌던 동전. 그리고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작은 소망.


나는 이미 세 번 로마를 찾았다. 그리고 또다시 이곳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로마는 한 번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도시였다. 아니, 어쩌면 몇 번을 와도 다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는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한 골목길이 있고,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으며, 내가 마시지 못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 남아 있다.


나는 로마를 떠나지만, 로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 도시는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가 영원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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