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불순물 17화

파편의 우주를 항해하는 자에게

by 브레인캔디

철의 숨결로 가득 찬 지하철 역에서

누군가의 신발끈이 풀려 있다.

끝이 갈라진 고무줄 같은 인생.

그러나 발끝으로 지구를 밀며 걷는 법,

바로 그 힘으로 도시의 척추는 굽어지지 않는다.


* * *


폐허가 된 달력 위로 새빨간 동그라미는

죽은 시간을 일으키는 부활의 주문이다.

과녁 한가운데 박힌 화살촉처럼

상처는 때론 정확한 좌표가 된다.

우리가 부르는 '아픔'이라는 단어 속엔

아직 발효되지 않은 빛의 발효균이 잠들어 있음을

역설의 화살은 알고 있다.


* * *


창고에 버려진 피아노의 검은건반 위에

곰팡이가 피어난다.

C와 D 사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부패조차 음악이 되는 순간.

썩어가는 현악기의 울림은

새로움을 향한 유일한 폭력이다.

우린 모두 부서진 메트로놈을 가슴에 묻고

흐트러진 박자로 심장을 두드린다.


* * *


폐쇄된 공장의 녹슨 컨베이어 벨트 위에

거미줄이 금빛 선율을 짜고 있다.

노동이 남긴 공허를 예술로 메꾸는

고요한 반역의 기술.

인간이 정의한 '쓸모'의 바깥에서

버려진 것들은 교향곡을 연주한다.

쇳조각이 꽃피우는 철의 봄,

무너진 크레인의 팔이 달을 가리킬 때

우린 비로소 허공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 * *


죽은 별의 파편이 눈동자에 박힌 채

우주를 해석하는 자들.

망원경 대신 깨진 유리병을 들이대면

은하수가 상처의 굴절률로 빛난다.

고통은 광년(光年) 단위의 망원경이다.

가장 찬란한 별빛은

가장 오래된 상처를 통과해 도착하니까.


* * *


빗방울이 콘크리트를 뚫는 방법을 묻거든

침묵으로 길을 내는 풀뿌리를 보여주라.

절망의 두께를 측정하는 자는

모래시계 속에서 영원을 헤엄치는

한 알의 규소 입자를 발견할 것이다.

시간이란 유리관 속을 떨어지는

공포와 경이의 중첩.


* * *


폭풍우 치는 항구에 선 뱃머리에서

파도를 삼키는 법을 배우다.

소금기가 스민 울음으로 나침반을 만들고

갈라진 갑판 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항해의 지도로 삼는 이가 있다.

난파선은 새 물결의 시작점이다.

바다가 가라앉히는 모든 것들은

표류(漂流)가 아니라

부유(浮游)의 새로운 형식을 배우는 중이다.


* * *


살아남음이 곧 반역인 시대.

공장 굴뚝의 연기처럼 흩어져야 했던 영혼들이

대기권에서 재결합하는 원리를 발견했다.

산소가 아닌 이야기로 호흡하는 생물,

그게 인간이다.

허파 대신 시(詩)로 숨을 쉬는 종족.


* * *


마지막 전철이 떠난 플랫폼에서

한 청년이 지하도의 벽에 손을 댄다.

수십 년 된 낙서들 사이로

새싹이 터나는 온도를 느끼며.

문명이 남긴 모든 상처는

푸른 것이 솟아나는 화산이다.

잿더미 위에 피는 꽃의 뿌리가

지구 중심까지 닿아 있음을

상처의 지질학은 증명한다.


* * *


우주의 모든 파편은

자신을 용광로로 삼는 별이 된다.

부서짐의 열역학 제1법칙:

흩어진 것들이 더 큰 중력을 만든다.

고통의 구심력으로 소용돌이치는

이 허무한 우주에서

네 가슴에 박힌 유리 조각 하나가

은하수를 가르는 돛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살아간다는 건

파편을 광장으로 삼아

폐허 위에 춤추는 일.

발을 찌르는 돌마다

새로운 지평의 초석이 되는

광기의 기하학.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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