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불순물 16화

오백만 원의 무게

by 브레인캔디

1.

숫자들은 나를 삼킨다. 오. 백. 만. 원. 혀 끝에 맴도는 네 개의 음절이 창백한 벽을 두드린다. 뼛 속까지 스며드는 금속성 냄새, 구리 동전이 이빨 사이를 맴도는 듯한 침의 쓴맛. ATM 화면에 떨리는 손가락이 세 번의 비밀번호를 외친다. 거절의 적신호가 눈동자를 찌른다.


2.

오백만 원은 콘크리트 바닥에 박힌 네일 아트다. 발목을 찌르는 스테인리스 못, 한 걸음마다 피가 철철 흐른다. 매일 아침 계좌 잔고와 눈싸움을 한다. 숫자들이 춤추며 내 신경 섬유를 타고 올라온다. 5,000,000원. 쉼표가 허리를 끊는다.


3.

지갑 속 영수증들이 속삭인다. "커피값 4,500원"이 "전기세 78,300원"의 귀를 물어뜯는다. 스마트폰 알림이 창밖을 기어오른다. 대출 만기일이 유리창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시간은 휴대폰 요금제처럼 매일 00시에 리셋되는데, 빚은 눈송이처럼 쌓인다.


4.

편의점 알바 제복이 피부에 녹아든다. 바코드 리더기 '삑' 소리가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새벽 4시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적녹청으로 나를 해체한다. 빨간불은 심장, 푸른 불은 간, 노란불은 담낭. 자동차 우박 속에서 내 장기가 춤춘다.


5.

꿈속에서 종잇장들이 날개를 단다. 오백만 원짜리 나비 떼가 코트 자락을 휘감는다. 공중에서 화폐가 해체되며 비처럼 내린다. 은행 앱 푸시알림이 현실로 끌어내린다. 이불속에서 손가락이 잔고를 세다가 멈춘다. 새벽 공기가 창살 사이로 기어들어 폐를 채운다.


6.

편의점 김밥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생각한다. 2,500원의 중력으로 내 장기가 눌리는 것을. 라면 국물에 얼굴이 비치는 순간, 수증기 속에서 오백만 개의 내 얼굴이 흩어진다. 각자 다른 표정으로 웃고 울고 비명 지르는 나.


7.

지하철 역 전광판 숫자가 점멸한다. 5... 0... 0... 0... 0... 0... 0... 환풍기 소리가 그 숫자들을 빨아들인다. 승강장 노란선이 목줄이 된다. 발끝이 공중에 매달릴 때 핸드폰이 진동한다. 미등록 번호의 문자: [당신의 계좌로 5,000,000원 입금]


8.

영업시간 종료된 ATM기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현금인출구가 입을 벌린 채 조소한다.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적어둔 암호키: HOPE. 새벽 첫 전동차가 레일을 울릴 때까지 숫자와의 결투는 계속된다.


9.

창고 번호 507. 박스 더미 사이에서 월급봉투를 연다. 오십만 원권 지폐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퍼백 속 종이들이 속삭인다. "우린 단지 숫자의 유령일 뿐"이라고. 크레딧카드 검은띠가 눈을 가린다.


10.

새벽 2시 17분. 전자레인지 시계가 적색으로 깜빡인다. 냉동만두 세 개가 돌아가는 소리. 500-7=493. 493만 원이 부재한다. 증발한 숫자들의 자리에 공기가 차오른다. 입안에서 녹는 만두 속에서 미지의 숫자들이 태어난다.


11.

동전 한 닢이 배수구로 미끄러진다. 쟁그랑 소리가 지하 3층까지 에코를 만든다. 오백만 원의 그림자가 배수관을 타고 흘러간다. 내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그 금액은 5,000,001원으로 변해있을지 모른다. 숫자와의 추격전은 새 날의 첫 숨과 함께 재개된다.


12.

창문 틈새로 새어드는 새벽 공기가 계좌번호를 속삭인다. 잠들어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 미확인 문자가 떠오른다. 오백만 원의 무게가 어깨에서 조금씩 미끄러진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포성이, 이번엔 다른 전선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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