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란 우주선은 결국 중력의 포로였다. 그 포로가 휴식이란 이름의 반란을 꿈꿀 때, 찾는 것은 오직 벤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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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숲의 바닥을 헤매는 이 발바닥들, 그 아래로 스민 땀과 먼지와 아스팔트의 쓴내는 도시의 뿌리가 되어 끊임없이 땅을 빨아들인다. 허리의 뼛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신음은 척추를 타고 올라 뇌를 두드리고,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납덩이들이 매달려 매 순간 지구 중력의 배율을 증폭시킨다. 이 지친 몸뚱아리. 이 무거운 덩어리. 이 영혼이라는 이름의 관광객을 실은 우주 난파선. 내려놓아야 한다. 단 한순간이라도, 땅에, 단단하고 차가운 무엇인가에, 이 무게를, 이 고통을, 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중력의 기계를, 내려놓아야 한다.
벤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철제 뼈대 위에 얹힌 나무판자일 수도, 구불구불한 콘크리트 곡선일 수도, 공원 한켠에 덩그러니 놓인 화강암 덩어리일 수도 있다. 형태는 무의미하다. 본질은 오직 하나다: 받아줄 것. 무릎 관절의 삐걱거림을, 발바닥의 불타는 저림을, 허리를 괴롭히는 칼날 같은 긴장을, 한 점의 저항 없이, 한 마디의 불평 없이, 그저 그곳에 존재하기만 하면서, 받아줄 것. 그것은 땅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땅의 배신자다. 땅은 끊임없이 우리를 잡아당기지만, 벤치는 그 잡아당김을, 잠시, 휴전 상태로 만들어준다. 앉는 순간, 몸뚱아리는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다 갑자기 부력의 품에 안긴 듯, 중력이라는 끈적한 덫에서 한시적으로 풀려난다. 척추는 서서히 풀리고, 허리의 납덩이는 벤치의 딱딱한 표면에 스며들어 흩어진다. 발바닥은 더 이상 땅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땅의 고요함을, 차가움을, 단단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벤치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허파다. 쉼이라는 산소를 내뿜는. 길을 잃은 여행자의 작은 오아시스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그러나 존재 자체로 길을 알려주는. 누군가의 흔적이 스민 그 표면은 – 아마도 낙서, 아마도 커피 얼룩, 아마도 빗물 자국 – 시간의 얇은 지층을 이루며, 그 위에 내 몸뚱아리를 내려놓는 행위는 과거와 현재의 피로가 교차하는 의식이 된다. 나는 벤치 위에 앉아, 내 무게를 그 위에 맡기고, 동시에 그 벤치가 견뎌낸 수많은 무게들을, 수많은 지친 몸뚱아리들의 흔적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일방적인 위탁이 아니라 교환이다. 내 피로와 그곳에 스며든 타인의 피로가, 침묵 속에서 중첩되는 교감.
보라, 저 노인은 신문지를 펼쳐 벤치의 절반을 차지하며 세상 소식 대신 햇살의 온기를 읽고 있다. 저 여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마도 구름 뒤에 숨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아이는 벤치 끝에서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모험인 양 신난다.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중력으로부터의 일탈을 실행 중이다. 벤치란 결국, 서 있음과 눕음 사이의, 불안정한 아름다움이 깃든 중간 영역이다. 완전한 수평(눕음, 죽음에의 유혹)도, 완전한 수직(서 있음, 투쟁의 자세)도 아닌, 기대어 있다는 것, 의지하고 있다는 것의 위대한 선언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은유다 – 완전히 쓰러지지도, 완전히 똑바르지도 않은, 기댈 곳을 찾아 헤매는 존재.
그러니, 벤치가 필요하다. 이 지친 몸뚱아리 하나, 이 영혼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땅의 차가운 위로를 등에 느끼며, 단지 숨 쉴 수 있는. 철제이든 나무이든 돌이든,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그 익명의 구조물이 필요하다. 앉는 순간, 발바닥이 땅을 기억하고, 척추가 하늘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하는 그 마법의 장소가. 그곳에서만, 우리는 잠시 우주 난파선의 엔진을 끌 수 있다. 잠시, 단지 존재할 수 있다. 벤치 위에, 중력과의 휴전선을 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