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불순물 22화

모래알 선언

by 브레인캔디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 우리가 강물 속에 던져진 모래알이다.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강물은 흐르되, 모래알은 그 속에서 제자리걸음만 반복한다고. 어쩌면 우리 모두, 영원히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하는, 흐름 속의 정지점인지도 모른다. 그 무게에 눌려, 그 속도에 휩쓸려, 우리는 스스로를 '시간을 산다'고 착각한다. 허상이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시간이 없다. 단지, 놀라움의 연속일 뿐. 할머니의 주름살에도 시간은 없다. 단지, 쌓인 햇살과 바람의 기록일 뿐. 시간이란, 우리가 발명한 가장 교활한 환상이다. 달력이라는 그리드, 시계추라는 심장 박동, 스마트폰 화면 속 끊임없이 흘러가는 숫자들... 그것들은 우리를 '시간의 주인'이라 속인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환상의 감옥 속에서 영원히 재소자 신분이다. 우리는 분 단위로 삶을 쪼개고, 초 단위로 불안을 측정한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공포에 떤다. 이 거대한 자기 기만극의 배우이자 관객인 우리.


나는 어릴 적, 할머니 마당의 커다란 목화밭에서 시간을 잃곤 했다. 목화꽃은 하얀 구름이 되어 땅에 내려앉았고, 바람은 잎사귀를 통해 속삭이는 비밀을 전했다. 거기엔 시계도, 약속도 없었다. 오직 해가 중천에 머물다 서산으로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만이 존재했다. 그 시간은 '지금'이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순수한 현재의 호흡. 할머니는 그런 시간 속에서 움직였고, 웃었고, 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서두름이란 없었다. 오직 햇살이 목화솜을 따뜻하게 감싸는 속도만이 존재할 뿐. 그곳에서 나는, 시간이란 물질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막연히 깨달았다. 시간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는, 생명의 탄성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그 탄성을 압착해 버렸다. 우리는 '효율'이라는 이름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위에 스스로를 눕힌다. 다리가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잡아늘인다.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부품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실시간'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지금-여기의 소중함을 지속적으로 배반한다. 식사 중에도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 중에도 다음 일정을 계산한다. 우리는 연결되었으되 고립되어 있고, 바쁘되 텅 비어 있다. 이 빛나는 공허함. 이것이 우리가 시간과 맞바꾼 것의 실체다.


그러므로 선언한다.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고. 우리가 강물 속에 던져진 모래알이라고. 그러나 이 모래알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작은 우주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강물의 흐름에 휩쓸리면서도, 그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창조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의 뜨거운 증기가 코끝을 스치는 찰나, 지나가는 바람이 스카프를 살랑거리게 하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눈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그 깨달음의 순간. 바로 그 찰나들이 진짜 시간이다. 달력이나 시계가 아닌, 우리 몸과 마음이 기록하는 생생한 현재들.


시간을 쫓지 말라. 그것은 끝내 잡을 수 없는 그림자다.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를 잠재우려는 거대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지금 이 호흡이다. 이 숨결이 가져오는 감각들, 이 순간이 품고 있는 무한한 깊이. 할머니의 목화밭처럼, 우리 각자의 내면에 그런 '시간 없는 공간'을 재건하자.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흐르는 강물 속에서도 고요한 중심을 잡은 모래알이 될 수 있다. 영원히 가라앉지 않고, 영원히 떠오르지 않는, 그러나 강물의 모든 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그런 모래알.


지금, 이 순간을 호흡하라. 그것이 유일한 시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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