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로 개척
그날 새벽, 우리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조용한 거실.
형광등 불빛 아래, 바둑판 위의 흑백 돌만 유난히 또렷했다.
돌이 놓일 때마다 또각, 또각.
마른 소리가 공기를 얇게 긁고 지나간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오래된 기억 하나가 올라왔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하나 무료로 들을 수 있었다.
형은 6학년이었다.
어느 날 나를 부르며
“야, 너 두 개 들어라.”
“왜?”
“그거 한다고 하면 애들한테 소문 나.”
그 나이엔 그게 그렇게 싫었을 거다.
집안 형편이 드러나는 일.
괜히 눈치 보이는 일.
그래서 형은 자기가 해야 할걸 나한테 넘겼다.
나는 두 개를 듣게 됐다.
월수금은 바둑,
화목은 컴퓨터.
그렇게
2학년부터 5학년, 전학 가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바둑을 배웠다.
집에 가도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바둑반에 오래 남았다.
아이들은 금방 나갔다.
지루하니까.
늘 몇 명 안 남는 교실,
나무 냄새가 배어 있는 바둑판,
그리고 60은 넘으셨던 선생님.
나는 혼자 남아서 바둑책을 들여다보고 선생님과 접바둑을 뒀다.
접바둑.
하수가 상수를 상대할 때
돌 몇 점을 깔고 시작하는 게임.
일종의 핸디캡이다.
선생님은 늘 사활 문제를 내주셨다.
나는 그게 좋았다.
사활.
돌의 삶과 죽음.
이 돌이 살 수 있는지,
아니면 결국 죽는지.
그걸 끝까지 따지는 문제.
나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집에 가서
공책에 다시 바둑판을 그려놓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도 둬보고,
저렇게도 둬보고.
한 수만 달라져도
살던 돌이 죽고,
죽은 줄 알았던 돌이 살아났다.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연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디가 막다른 길인지,
어디가 살아나는 길인지.
선생님은 내 기억으로 아마 6단 정도 되셨던 것 같다.
동네에서 바둑 좀 두는 수준이 아니라
지역 기원 고수들과도 붙을 수 있는 분이었다.
가끔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너 2~3급은 되겠네.”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건 꽤 괜찮은 평가였다.
보통 기원에서 제일 잘 두는 사람이 1급쯤 된다.
그러니까 내가 접바둑으로 1~2점을 받고
비등비등하게 둘 수 있다는 뜻이었다.
쉽게 말하면 어린애 치고는 꽤 두는 편이었다.
그 감각이
그날 새벽,
다시 올라왔다.
나는 처음에 건축주에게 예를 갖춰 흑을 들었다.
첫 판은 조용했다.
말은 거의 없었고 돌만 놓였다.
몇 수가 지나자 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가 이어지고,
어디가 끊기고,
어디를 건드리면
판 전체가 숨을 못 쉬는지.
중반쯤,
그분의 손이 한 번 멈췄다.
돌을 들고 허공에서 잠깐 멈춰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아, 이 판은 내가 이긴다.’
결국 내가 이겼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돌을 다시 담았다.
그리고 백을 들었다.
그분이 웃었다.
“자신 있냐?”
“아닙니다.”
“그럼 왜 바꾸냐.”
“…한 판 더 둬보려고요.”
두 번째 판은 더 빨리 끝났다.
그분이 물었다.
“너 어디서 배웠냐?”
“초등학교 때 조금 배웠습니다.”
“조금?”
세 번째 판은 확인에 가까웠다.
사활을 오래 본 사람은
판을 읽는 감각이 몸에 남는다.
어디를 살려야 하는지,
어디를 버려야 전체가 사는지.
그 판단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아침 6시쯤,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술기운도 있었고,
긴장도 풀렸고,
머리가 갑자기 아래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분이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 임마, 나중에 다시 한 판 붙자.”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대화,
바둑판 위의 세 판, 내가 털어놓은 이야기들.
아직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뒤,
계단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그분 손에는 현금이 들려 있었다.
5억이었다.
그 큰돈이 새벽의 조용한 거실,
테이블 위에 너무 아무렇지 않게 올라왔다.
이상한 장면이었다.
돈의 크기보다 그걸 건네는 태도가 더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를 문제도 있으니…
차용증은 쓰게 해 주십시오.”
그분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다르게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귀인이 나타났다.
우리 회사 대표님이었다.
그 무렵 회사는 점점 더 까다로운 현장을 맡고 있었다.
그냥 집이 아니었다.
구조가 복잡하고, 디테일이 많고,
한 번 틀어지면 뒤가 전부 무너지는 현장들.
그날 사무실은 유난히 정신이 없었다.
도면은 책상 위에 겹겹이 쌓여 있었고
현장 일정표는 이미 엉켜 있었다.
대표님이 나를 불렀다.
“대희야.”
“예.”
대표님은 잠깐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요즘 현장이 너무 늘어난다.”
한숨처럼 이어졌다.
“내가 혼자 감당이 안 된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왔다.
“너 월급 받지 마라.”
“… 예?”
“내가 현장을 너한테 토스해 줄 테니까
나는 전체 공사금액에서 일정 퍼센트만 가져갈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잠깐 멈췄다가 더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네가 이 돈으로 얼마를 남기든,
얼마를 손해 보든 그건 니 책임이다.”
“하자보수도요?”
“그것도 니 책임.”
그건 말 그대로였다.
월급 받는 직원이 아니라 현장을 통째로 맡는 사람.
남기면 내 돈, 틀리면 내 손해.
대표님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할 수 있겠나?”
나는 고민도 안 했다.
“네.”
대표님이 웃었다.
“뭘 믿고 그렇게 바로 하냐.”
나는 그냥 말했다.
“잃을 것도 없는 놈인데 한번 해보는 거죠.”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대표님이 꺼려하던 현장은 거의 다 내 몫이 됐다.
남들이 피하는 현장.
골조 정밀도가 민감한 곳,
기초 오차 하나가 위로 다 올라가는 곳,
철물 하나 틀어지면 뒤 공정이 줄줄이 무너지는 곳.
건축은 실수가 곧 돈이다.
한 번은 중목 골조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기초에 잡힌 베이스 위치를 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도면상으로는 맞는 것 같은데
현장에서 줄자를 다시 대보니 미세하게 틀어져 있었다.
몇 밀리.
몇 센티.
사람들은 보통 그 정도면 그냥 넘어간다.
현장은 늘 바쁘니까.
근데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 그냥 가면 편하다.’
‘근데 이거 위에서 틀어지면 그때는 더 크게 깨진다.’
그날 결국 다시 확인하고,
다시 수정하고, 다시 맞췄다.
그날은 손해였다.
시간도 더 들고, 사람도 더 들어가고,
괜히 예민하다는 말도 들었다.
근데 판은 살았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점점 그렇게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 덜 아프려고 밀어붙이지 않고
지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전체를 살리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
생각해 보면 그건 바둑이랑 똑같았다.
한 수 잘못 두면 판이 죽는다.
근데 지금 한 수 바로잡으면 전체가 살아난다.
나는 점점 사활 같은 인생에서
활로를 찾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던
술을 멀리했다.
담배도 끊었다.
한 번이라도 판단이 흐려지면
그게 그대로 손실이었고
그 책임은 전부 내 몫이었다.
그렇게 버텼다.
친구들에게 빚을 조금씩 갚고
남아 있던 2억의 이자를 내면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2023년 8월.
딱 3년 만에 5억을 벌었다.
정말 많이 일했다.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3년 만에 내가 타던 트럭이 26만 km를 찍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내가 해낸
수많은 까다로운 프로젝트들은
일에 대한 뿌듯함과 열정만으로
완성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빚이 더 큰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나를 몰아붙였고, 그게 나를 키웠다.
그 시기에 커졌던 내 역량이 지금 와서 보면
조금은 고맙기도 하다.
남은 2억을 먼저 갚을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근데 나는 그 5억을 먼저 갚아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2023년 7월,
5억을 들고 다시 파주의 그 건축주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늦었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너라면 한 2년 만에 갚을 줄 알았는데.”
농이 지나치시다.
나는 웃으며 인사드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꼭 제가 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당연하지 임마.”
나는 솔직히 조금 비싼 데를 생각했다.
그래도 5억을 빌려준 사람인데
괜찮은 데 모시고 싶었다.
근데 그분은 아무렇지 않게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또 한 번 생각했다.
정말 이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게 안은 김이 자욱했고
테이블은 눅눅했고 플라스틱 의자는 가볍게 끌렸다.
내가 물었다.
“수육이라도 시킬까요?”
그분이 바로 말했다.
“아니. 여기 순댓국 특으로 주세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소주 한 병도 시켰다.
밥을 먹다가 그분이 툭 물었다.
“그래서 너, 내가 왜 빌려준지 찾아왔냐?”
순간 켁, 하고 체했다.
그분이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어 임마.”
밥을 다 먹고 그분 회사 사장실로 들어갔다.
아까 순댓국집의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문이 닫히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분이 의자에 앉더니 나를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너 임마 예전보다 좀 더 못생겨진 것 같다?”
맞다. 진짜 개처럼 일했으니까.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3년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습니다.”
잠깐 웃음이 지나가고 그분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이제 진짜 얘기가 시작되는구나.
그분이 물었다.
“너 나머지 2억은 갚았냐?”
나는 바로 말했다.
“아뇨. 일단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그분이 가만히 나를 봤다.
“대표님 빚부터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당연하다는 듯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그리고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