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種)의 기원 - 도형의 기원
전 회차 마지막 부분을 이어서...
세모는 망연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뭉게구름이 서서히 조개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이쯤에 와서는 새털구름이 되는 걸 보았다. '하물며 생명체도 아닌 구름조차 하고 싶은 모양을 다양하게 만들어 내는데 난 이게 뭐냐'며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 순간 세모는 불현듯 뭔가 생각에 사로잡히더니 눈이 금새 커졌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자리를 박 차고 일어선 세모는 뒷바람을 타고 한 마리 날렵한 제비처럼 하늘을 나는 듯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전신거울 앞에서 장엄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세모를 마주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아왔던 거울 속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머리끝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바닥을 이루고 다시 머리로 이어진 것이다. 선을 유심히 바라본 후 세모는 두어 걸음 뒤로 나와 깊게 숨을 들이 마신채 어깨를 좌우로 그리고 앞뒤로 세차게 흔들어댔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뼈마디가 분리되는 듯 미간을 찡그리게 했으나 세모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악 물고 더욱 세차게 흔들었고 이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쿵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 밖에는 어스름한 달빛이 소리 없이 희미한 그림자를 그리고 있고, 연푸른 빛의 조각달은 세모 집의 창으로 새어 들어 더욱 초연한 푸른빛으로 주위를 채우고 있다.
바닥에는 잠시 전까지 거칠게 자신을 흔들어 대던 세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기저기 은빛 구슬이 흩뿌려져 있었다. 구슬은 세모의 몸이 부서지면서 마치 핵융합과 같은 강한 부딪힘이 연쇄적으로 폭발하여 세 군데 선을 휘어지게 했고 급기야 선을 이루고 있던 점들이 '펑'하며 구슬이 되어 튀어나왔다. 사방에 흩어진 구슬의 합은 모두 마흔네 개였다. 구슬들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누가 먼저일 것 없이 하나 둘 거울 앞에 모여들었다. 그중 유난히 반짝이는 은빛구슬이 목을 가다듬으며 짧지만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는 세모의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뾰족한 외모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른 도형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이번 기회에 우리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보는 게 어때?" 나머지 구슬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은빛구슬은 잠시 메마른 입술을 오물거린다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우리 구슬들은 모두 마흔네 개이니 이참에 힘 있어 보이는 정사각형이나 아니면 조금 트렌디한 직사각형으로 바뀌면 어떨까?" 은빛구슬의 제안적 질문에 구슬들은 또다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자 볼멘소리를 섞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은빛구슬은 스스로도 결정장애가 있는 걸 잠깐이나마 잊은 걸 후회했다. 서둘러 큰 목소리로 힘 있게 말했다. "자 우선 정사각형으로 한 번 해보자. 열한 개씩 손을 마주 잡고 선을 만든 후 다른 선의 손을 잡아봐."
구슬들은 은빛구슬의 구령에 맞추어 어렵지 않게 정사각형을 만들어냈다. 거울 앞에 선 정사각형은 어렵사리 세모에서 네모로 변했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혀 새로운 모습을 기대했지만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항상 동경하며 보아왔던 네모, 그 네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작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네모가 되었음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건 네모를 따라 자신을 바꾸었지만 되레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일종의 '소실감' 때문이었다.
은빛구슬도 막상 네모로 변한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에 당혹해했지만 이내 직사각형으로 바뀌어 보자고 했고, 구슬들도 망설임 없이 7, 7, 15, 15 씩 나뉘어 선을 만들고 손을 맞잡아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멋진 황금비율까진 아니더라도 그럴싸하게 변한 모습에 모두들 흐뭇해했다. 살짝 옆으로 보니 타임스퀘어의 광고판처럼 길게 쭉 커져 지금이라도 잘생긴 연예인이 등장하는 커피 광고를 얹어줄 수 있어 보였다.
구슬들은 가로로 길게 서 보았다가 다시 세로로 길게 서 보니 정사각형일 때보다는 훨씬 멋지게 변한 모습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이내 잠시 은빛구슬의 눈에서는 호숫가 물안개가 걷히듯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직사각형으로 변했지만 이 역시 평소 부러워했던 다른 도형의 모습을 따라 했을 뿐이고, 이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소실감이 메마른 드라이아이스에서 서서히 나오는 냉기처럼 가슴을 더욱 차갑게 했다.
뭔가 잘 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을 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외침이 들렸다. "이봐 친구들 나를 좀 꺼내 줘.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고." 구슬들은 소리 나는 방향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방구석 모서리 깊은 구멍에 구슬 하나가 뿌연 먼지를 잔뜩 묻힌 채 빠져 있었다. "이봐 계속 그렇게 못생긴 벌레 보듯이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어서 꺼내달라고." 은빛구슬과 함께 몇 개의 구슬은 손에 손을 엮어 밧줄을 만들고 힘겹게 꺼내어 주었다. "휴~ 고마워. 덕분에 먼지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었어." 여기저기 뿌연 먼지를 털어내서 가쁜 숨소리를 섞어 말을 했다. "이봐 친구들 내가 저 구덩이에 빠져 있는 동안 자네들이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어. 눈물이 날 정도의 노력이더구먼. 그런데 말이야 마흔네 개의 구슬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변하기에 안성맞춤인 숫자였겠지. 하지만 이제부터 나를 빼놓고 변하는 건 안될 말이야. 나도 자네들과 한 몸이었고 동고동락한 같은 구슬이란 말이지."
여러 구슬들은 어깨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거렸고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바닥에 떨구었다.
작가의 생각: 44개의 구슬들은 마지막 구슬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