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마음으로
오늘은 글을 시작하기가 영 힘들어서 맥주를 한 캔 깠다.
내가 손절해 버린 한 친구에 대한 글이다. 그녀에게 '너와 더 이상 만나지 않겠노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본인이 손절당한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생일마다 '소중한 내 친구 오엉'하며 축하를 보낸다. 나는 오늘 지난 생일에 그녀가 생일선물로 보낸 책을 버렸다.
그녀와의 인연은 오래됐었다. 우리는 중학생 때 학원에서 만나 같은 관심사를 통해 연결되며 친해졌다. 어느 때엔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 늘 함께 다닐 때도 있었다. 나는 웃기고, 쿨하고, 짝사랑에 괴로워하는 내게 시원시원한 조언을 서슴지 않는 그녀를 아주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 소중한 친구로 여겼다.
대학생이 되면서 활동지가 달라져 연락이 뜸해졌다가,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만나지 못한 세월이 오래였어도 다시 만난 반가움만큼 할 말이 많았다. 그동안의 연애사와 청춘으로서의 각개전투를 서로 쏟아내며 술을 마셨다. 그날 새벽, 나는 참지 못하고 내 비밀을 그녀에게 털어놨었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에 진심으로 함께 마음 아파하며 자신에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헤어졌었다.
그날 이후 종종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마다 피곤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세월호 진상규명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수요집회(공식 명칭: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대한 이야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이야기나 남자친구와의 성생활이 언제부터인가 야만적이게 느껴져서 플라토닉 러브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충분히 흥미롭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지만, 문제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 얘기들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녀와 만나면 그녀와 나의 대화 지분은 9:1 정도였고,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수요집회에 가볼 것을 제안했다. 옳은 일을 게으름 탓에 실행하지 않는 내가 점점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와의 약속에 나도 모르게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던 날이었다. 그녀는 내가 요즘 연락이 뜸해 서운하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맨날 다른 친구들과 놀러 다니면서 왜 자기와는 뜸하게 만나냐고. 내가 널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냐고.
그러면서 내가 털어놨던 비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얘기를 듣고 자기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냐고. (나를 모르는) 자기 친구들에게 '내 친구 중에 이런 애가 있다.'고 말하며 얼마나 자랑했는지 아냐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내 고통을 감히 알량한 친구 자랑 혹은 안줏거리로 팔아먹은 그녀에게 물을 끼얹고 뛰쳐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피씨(Politically Correct)했기 때문이다. 나는 침착하게 '고맙다'고 했다. 그 순간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특별함과 반짝임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은 어두운 동굴 안에 발이 묶여 바라보는 창밖 세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됐었다. 족쇄를 풀어내고 동굴 밖으로 나오기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동굴 얘기를 하지 않는 곳으로 나오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었다.
그녀가 보내준 책은 읽지 않았다. 저 책을 통해 나에게 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 싶어서.
그녀의 말이 틀렸던 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세월호 유가족에게는 진상규명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어떤 위안부 할머니의 자손에게는 수요 집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배려일 수도 있다.
그녀나 작가의 의도를 오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괴로워 읽지 않았다.
읽을 수가 없었다.
연아. 나 또한 너의 이야기를 한낱 글감으로 전락시켜 미안해.
혹시나 어떤 운명의 장난을 통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날 용서해 줘. 그리고 연락하지 말아 줘.
난 새 마음으로 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