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엉 Apr 08. 2024

1일 1버리기 12일차

어울리지 않는 트렌치 코트


외로움에 미쳐버려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부여하며 혼자 서두르고 상처 받고 미워하던 그 애,

이런 특별한 만남은 운명이라고 믿으며 홀딱 반해서 혼자 돈도 시간도 마음도 다 썼지만 가질 수 없었던 그 애,


이 뻘짓들의 태초에는 시버-러브(Cyber love) 그애가 있었다.




그애를 처음 만나러 가는 날, 이 트렌치 코트를 입었다.


내 키에 비해 너무 길고 내 몸에 비해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 옷이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멋져보이는 것 같았다. 그애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멋'은 부려야 할 것 같았다. 잘 입지도 않는 셔츠에 이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그애를 만났다. 이 옷이 메인이기 때문에 실내에서 아무리 더워도 트렌치 코트를 벗지도 못했다.


알고 지낸 게 벌써 몇달인데, 소개팅에 나온 사람처럼 잘 보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애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연신 칭찬했고, 나는 그애도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가 긍금했다. 헤어지는 지하철역에서 나는 아쉬워했고, 그애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애는 다른 여자애를 좋아했고, 그 여자애도 나처럼 그애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둘은 사귀게 됐고, 나는 패배감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그애에 대한 내 마음을 함구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상대이면서, 왜 그애를 궁금해했을까.






그애는 내게 맞는 옷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의 B급 감성에 눈이 훼까닥 뒤집어졌었지만, 사실상 그애의 얼굴이나 키, 직업, 성격 등등을 따져보면 나와 그리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급진 커리어우먼같은 느낌을 기대하며 샀지만, 오빠 옷 빌려 입고 나온 어린애로 만들어버리는 트렌치코트 같달까.


몇년이 흐른 후 그 둘의 결혼소식을 듣게 됐다. 둘이 어울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와 그애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울리지 않는 옷을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어차피 그애를 만나러 갈 때 입은 후로는 영 손이 안 가 몇년 째 입지도 않았다. 이제는 내 인생에 어울리는 옷만 남겨야지.











* 이번주 수요일, 금요일은 연재를 쉬어갑니다. 모두 투표 잘 하시고 푹 쉬셔요 :) 감사합니다 :)















이전 12화 1일 1버리기 11일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