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하고도 고마운
얼마 전 흰 바지로부터 백색경보를 접한 후
정말로 체중조절을 할 마음이 좀 생겼다.
1. 급식을 먹을 때 밥 양을 좀 줄였다.
2. 평일에 맥주를 안 마셨다(금요일 저녁은 주말이다).
3. 퇴근 후 낮잠 자는 대신 운동을 하려고 퇴근길에 있는 헬스장을 알아봤다.
그러던 중 정말 직장과 집 딱 중간에 있는 헬스장의 1:1 PT 체험권에 당첨됐다. 할렐루야.
헬스장용 운동화를 챙겼다.
언제 갖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분홍색 나이키 운동화.
왜 ‘갖게 됐는지’라고 표현하냐면, 내가 산 운동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과거에 언니로부터 받았다고 기억한다. 언니가 샀는데 작아서 나에게 줬는지, 언니 친구가 신던 운동화를 나에게 줬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언니한테 받은 이 운동화는 그때부터 늘 내게 실내운동용 운동화로 쓰였다.
지난주 수요일에 헬스장에 가서 피티를 받는데 오른쪽 밑창 앞부분이 들썩거렸다.
‘이놈 또 이러네.’
작년에 헬스장에 다닐 때 임시방편으로 순간접착제 붙여놓은 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피티를 받는 내내 신경 쓰였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랐다.
50분여의 피티가 끝나고 트레이너 선생님은 유산소를 20분 정도 하고 가라고 하셨고, 나는 트레드밀에 올랐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쪼ㅑ
ㄱ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왼쪽 밑창 뒷부분이 떨어졌다.
이쪽은 또 재작년에 헬스장 다닐 때 임시방편으로 순간접착제 붙여놓은 게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밑창이 아주 시원하게도 떨어졌다.
트레드밀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급히 정지 버튼을 누르고 상황을 살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내 근처에서 뒷타임 회원님을 봐주고 있었다.
‘봤을까?’
무료로 피티 체험을 받으러 온 사람인데 운동화 밑창까지 다 너덜너덜하다니. 날 완전 거지로 보면 어떡하지.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트레드밀에서 내려와 눈이 마주친 트레이너 선생님과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걸어갔다. 밑창 떨어진 운동화는 걸을 때마다 쩌억 쩌억 박수 소리를 냈다.
창피했다.
생각해 보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운동화 때문에 얼굴 빨개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집에 돌아와 순간접착제를 발랐다. 이미 재작년에 수명을 다한 운동화였는데 너무 오래 미련을 떨었다.
창피했는데, 또 지나고 나니 별 거 아니기도 했다.
진짜 거지가 맞아서인지, 뭔가 시작할 때 ‘장비빨’ 앞세우는 걸 싫어해서인지, 실내운동용 운동화를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런닝용 운동화 그거 닦아서 가져와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운 좋게 운동화를 얻었고, 몇 년이나 잘 신고 운동했다. 썩 맘에 드는 운동화도 아니었고 운동할 때 썩 편한 운동화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운동화가 있어 작심삼일 헬스장 등록이 두렵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순간접착제 없이 보내주려 한다.
고맙다. 잘 신었다.
몇 년을 잘 버티다가 1일 1버리기를 연재할 때 수명을 다해준 것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