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경보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어릴 때부터 잘록한 허리는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통통하고 짧은 다리가 콤플렉스였다.
무다리를 가리기 위해 치마는 쳐다도 보지 않았었다. 종아리만 굵냐 하면 허벅지 또한 튼실해서 바지는 늘 허리가 아닌 허벅지에 맞춰 크게 샀다.
때문에 잘록한 허리를 살려주면서 하체비만을 가려줄 바지를 찾으면 기쁘게 오래 입었다. 1일 1버리기를 시작하면서도 바지는 잘 버리지 못했다. ‘이렇게 잘 맞는 건 찾기 어려워’ 하며.
그런 바지 중 하나를 오늘 출근길에 입어봤다가 지각할 뻔했다. 바지가 맞지 않아.
‘분명 작년에도 입었던 것 같은데’ 하며 허벅지부터 꽉 낀 바지를 억지로 올렸다가 엉덩이께에서 도저히 더 올라가지 않는 바지를. 올라가지만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내려가지도 않는 바지를.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몸으로부터 탈출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사실은 작년에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입지 못했을 것이다. 살이 찐 건 비단 하루이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못해도 2년은 넘게, 5kg은 넘게, 꾸준히 야금야금 살이 쪄왔다.
잘록한 허리 밑에 뱃살이 늘어지는 것도, 슬금슬금 무릎이 아파지는 것도. 족저근막염이 심해지는 것도, 심지어는 매일 입던 바지의 허벅지 부분이 터지는 것도 모른 체해왔다.
오늘 내게 들이닥친 하얀 바지의 백색경보.
백색경보(白色警報)
1. 적기나 적 유도탄의 공격이 끝났거나 당분간 없을 것으로 예상되거나 공격가능성이 희박할 때 하달하는 방공경보.
2. 공습(경계) 경보해제.
3. 적기가 공습을 끝내고 돌아갔거나, 또는 공습의 위험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경보.
4. 적기의 공습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
적의 공격-체중 증가-은 끝났다. 하지만 공격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얀 바지를 버리며 역공을 다짐한다.
진짜. 해보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