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개요 드라마 미국 95분
개봉 2010년 01월 21일
감독 마크 웹 Marc Webb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차갑고도 따뜻한 역설적인 숨결로 열린다. 화면 위에는 짧은 경고가 흐른다. “이건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곧장 우리를 배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격하는 건 러브스토리의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파편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여름의 이름을 가진 여자, 그리고 그 계절에 휩쓸린 남자의 기억이다. 썸머(Summer)라는 이름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한 시절의 온기와 환상, 그리고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계절의 속성을 상징한다. 오프닝은 그래서 곧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알리는 장치이다. 도입부의 모노톤 같은 내레이션은 관객에게 친절하면서도 냉정하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무너진다.'라는 암시를 담고 있지만 정작 관객은 그 길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마크 웹 감독의 연출은 시곗바늘을 정방향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500일이라는 숫자는 일직선의 타임라인이 아니라 뒤섞인 조각, 무질서한 퍼즐처럼 배열된다. 그 조각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전체를 완성해 나간다. 오프닝은 그래서 단순한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감정의 지도와도 같다. 그곳에서 관객은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디뎠던 시간, 이미 지나간 듯하지만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풍경을 다시 걷게 된다.
2. 독특한 남성 캐릭터
톰 한센(조셉 고든 레빗 Joseph Gordon-Levitt),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던 남성과 다르다. 그는 수다스럽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며, 결정 앞에서 주저한다. 한마디로 우유부단하다. 하지만 바로 그 결핍이 매력으로 변환된다. 보통 영화 속 남성상은 강인함과 확신, 이끌어주는 리더십 같은 ‘마초적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톰은 여성을 구원하거나 압도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 앞에서 연약해지고 불안해하며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 감정을 과대 해석한다. 그 모습이야말로 지금의 관객들—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진솔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누구나 비슷한 모습이 된다.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이 늦으면 온 세상이 흔들리고 그녀가 웃어주면 지구가 내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착각한다. 톰의 캐릭터는 바로 그 과장된 내면극을 솔직히 드러낸다. 여성적 성격이 투영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적인 매력에 가깝다. 감독은 톰을 통해 남성성의 낡은 껍질을 벗겨내고 사랑의 무력감과 환희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톰은 어설프고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는 캐릭터가 된다.
3. 주제
〈500일의 썸머〉가 품은 주제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오히려 심연처럼 깊다. 사랑은 언제나 주관적 착시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무심코 웃은 순간, 평범한 거리의 벽돌 하나마저 운명의 징표처럼 빛나고, 옆자리에 앉은 우연은 필연으로 둔갑한다. 엔젤스 노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L.A의 전경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톰의 눈에 비친 사랑의 색채가 그 도시 전체를 물들이기 때문이다.
연애 초반의 아드레날린은 도시를 다시 그린다. 브래들리 빌딩 옥상에서 둘이 나란히 서 있을 때, 유리창에 반사된 빛은 천체의 궤도처럼 느껴지고 오래된 건물의 질감은 마치 두 사람의 미래를 새겨놓은 오래된 일기장 같다. 다운타운의 아트 디스트릭트 골목길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연인의 심장 박동이 벽에 새겨진 흔적처럼 읽힌다. 그녀의 손끝이 스치면 L.A의 가로등조차 별빛이 되고 그녀의 무심한 한마디가 톰의 가슴에 영원한 낙인처럼 남는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를 환상 속에 오래 머물게 두지 않는다. 같은 거리를 다시 걸을 때 불빛은 푸르스름하게 바래고 옥상 위의 바람은 더 이상 속삭임이 아니라 허전한 바람 소리가 된다. 그토록 믿었던 운명은 사실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을 톰은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상처 그 자체가 아니다. 흩어진 순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완벽한 직선이 아니다. 그것은 곡선이며 파편이며 때로는 충돌과 붕괴이다.
썸머와의 관계가 끝났을 때 톰은 자신이 무너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도시가 그렇듯 사랑도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건축을 시작한다. 이별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의 또 다른 형태이다. 준비 없는 끝맺음조차 하나의 이야기로 남아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쓰게 한다. 〈500일의 썸머〉는 묻는다. “사랑은 그저 실패였는가 아니면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가?” 그 답은 매번, L.A의 저녁노을처럼 관객의 가슴속에서 새롭게 빛난다.
4. OST
〈500일의 썸머〉가 가진 매혹은 그 음악에서도 빛난다. OST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톰의 내면을 대변하고 썸머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정서적 언어이다. 영화 속 음악들은 팝과 인디록을 오가며 한편으로는 감각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날 것 같은 진심을 담아낸다. 특히 The Smiths의 ‘Plesa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노래가 흐르는 순간,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취향을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그 장면은 단순히 음악의 힘을 넘어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경험하는 ‘예기치 못한 공명’을 상징한다. 톰이 혼자 거리를 걸을 때 들려오는 경쾌한 곡조, 그리고 이별 후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잔잔한 선율은 서로 대비되면서도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OST는 관객에게 톰의 심장박동을 그대로 전달하는 심포니처럼 작동한다. 노래는 때로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말한다. 음악이 꺼진 순간의 공허함조차 관객은 톰의 상실감을 체험하는 방식이 된다. 이 영화가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음악적 언어 때문이다. 이 영화의 OST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의 통역자이다.
5. Style 스타일
마크 웹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철저히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그는 시간을 직선적으로 풀지 않는다. 500일이라는 기간을 마치 카드 섞듯 뒤섞어 보여줌으로써 사랑이란 기억의 총합이자 감정의 파편임을 드러낸다. 화면의 색채 변화—밝고 따스한 색조에서 차갑고 청색빛으로 기운 톤까지—는 톰의 감정선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다. 무엇보다 영화 속 환상 시퀀스, 뮤지컬 같은 춤 장면, 그리고 건축적 상상 속에서 그려지는 도시 풍경은 사랑이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항상 흔들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때로는 친밀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주인공을 응시한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잔잔한 가을의 순풍이 불어올 때 톰의 얼굴은 변한다. 처음엔 세상을 얻은 듯 환희로 빛나던 표정이 이제는 쌉싸름한 달콤함을 머금은 표정으로 바뀐다. 마크 웹 감독은 그 얼굴 위에서 연애의 상하곡선을, 즉 ‘사랑의 기후변화’를 읽어낸다. 스타일은 화려하지만 결코 허공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기법은 결국 사랑이라는 인간적 경험을 더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500일의 썸머〉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한 편의 기억의 수첩, 우리 마음의 풍경화로 남는다. 2010년 한 인터뷰에서 마크 웹 감독은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복잡함과 파편화된 기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관객이 톰의 내면을 감정적으로 이해하도록 의도했으며,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출처:/Interview with Marc Webb, Collider, 2010)
고 밝혔다. 또 2011년 인터뷰에서는
이 영화 속 색채 변화와 음악, 그리고 환상적 장면들은 다 사랑의 기복과 감정 변화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나는 감정을 진실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며 '로맨틱 코미디'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이야기하고자 했다. (출처:/Anthem Magazine Interview, 2011)
고 말하며 자신만의 독창적 스타일을 강조했다. 이처럼 마크 웹 감독의 연출 철학과 스타일은 그의 인터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전통적인 틀을 벗어나 사랑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다. 이 점은 영화 〈500일의 썸머〉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임에도 깊은 공감과 신선한 시선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봄처럼 여름처럼 영화처럼 스물일곱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