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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럼 여름처럼 영화처럼 스물아홉 번째!

귀를 기울이면

by 달빛바람

개요 일본 애니메이션 111분

개봉 1995년(일본)

감독 콘도 요시후미 近藤喜文


1. Opening 오프닝

스튜디오 지브리의 1995년 작품 <귀를 기울이면 (耳をすませば)>은 도쿄의 여름밤, 한 곡의 올드 팝으로 문을 연다. 낡은 LP판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멜로디는 보는 이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누구나 콧노래로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노래. 그 노래는 먼 시절의 기억처럼 우리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 있던 순수의 시간을 불러낸다.

주인공 시즈쿠는 그 오래된 멜로디에 새로운 언어를 입히려 한다. 번역이 아닌 ‘번안’, 낡은 노래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 창작의 시도. 하지만 가사는 좀처럼 입에 붙지 않고 시즈쿠의 마음에도 들어차지 않는다. 그 어색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소녀는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 언어와 감정, 꿈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으려 한다.

이 오프닝은 2가지를 암시한다. 첫 번째는 추억의 시간으로의 초대이다. 90년대 도쿄의 공기, 느릿한 전철, 가로등 불빛에 깃든 낭만은 어른이 되어 잃어버린 감수성을 불러낸다. 마치 오래된 노래가 흐르는 순간, 잊고 있던 여름밤의 냄새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두 번째는 창작의 고통이다. 시즈쿠가 낡은 노래를 새롭게 부르려 애쓰는 장면은 곧 예술가의 탄생, 혹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고백의 시작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래서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청춘의 자각이다. 익숙한 멜로디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려는 시즈쿠의 여정은, 우리 모두가 지나온 사춘기의 초입과도 닮아 있다. 그 시절 우리는 세상의 언어를 흉내 내며 누군가의 문장을 베끼며, 결국엔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시즈쿠가 노래를 번안하듯 우리 또한 세상이 들려주는 노래에 자신만의 뜻을 덧입히며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귀를 기울인다’는 말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행위가 된다.


중학교 3학년. 아직 바깥세상이 궁금하고 모험을 좋아할 나이, 친구의 한마디에 속상해 울고, 서투른 고백에 잠 못 이루는 시기. 영화는 정감 어린 그림체와 귀엽지만 당찬 주인공을 통해 우리를 그 시절로 초대한다.



2. 이 모든 건 고양이 때문이야

주인공 시즈쿠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예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들어서는 세계는 환상의 굴이 아닌 현실의 틈새이다. 앨리스가 흰 토끼를 쫓아 꿈속의 비틀린 세계로 추락했다면, 시즈쿠는 전철 안에서 만난 통통한 고양이를 따라 도쿄의 평범한 골목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나 그 끝에서 그녀가 발견하는 건 '기묘한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을 두드리는 또 다른 현실이다. 출입금지 표지를 넘어 들어선 그곳에는 낡은 시계와 먼지 쌓인 골동품, 그리고 정장을 차려입은 고양이 남작 ‘바론’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공간은 도피의 장소가 아니라 시즈쿠의 감정이 빛과 먼지처럼 가볍게 흩날리며 형태를 얻는 창작의 원천이 된다.

앨리스가 비이성의 세계에서 자아의 파편을 마주했다면 시즈쿠는 그 가게의 고양이와 시계 속에서 ‘시간’과 ‘성장’이라는 은유를 마주한다. 앨리스의 시계는 늘 도망치는 시간, 잡히지 않는 순간의 상징이었다. 반면 시즈쿠의 시계는 세이지가 장인의 꿈을 좇아 떠난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다. 이 두 시계의 차이는 곧 세계의 결이 다름을 말한다. 앨리스의 세계가 현실의 부조리를 비트는 꿈의 풍자라면 시즈쿠의 세계는 그 현실 속에서 ‘환상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상상의 힘이다.

감독은 이 환상을 과장하거나 판타지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의 먼지 낀 창문을 통해 작은 빛의 입자를 통과시키듯 그 문틈으로 상상의 세계를 비춘다. 그 빛은 도피의 유혹이 아니라 성장의 신호이다. 시즈쿠는 고양이를 따라 문턱을 넘고 결국 스스로의 불안과 마주한다. “나는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 할 현실의 골목에서 울려 퍼진다.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면 시즈쿠는 현실 속에서 꿈을 길어 올린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면>의 세계는 환상이 아니라 ‘내면의 환상’, 현실이 품은 가장 작고 고요한 기적이다. 고양이는 흰 토끼처럼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지만 그곳에서 시즈쿠가 마주한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성장의 세계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골목 끝, 오래된 시계와 먼지 낀 서가,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 속에 숨어 있다.



3. 번안곡의 추억과 마법 같은 순간

그 시절의 번안곡 문화는 어쩌면 이 영화가 품은 감수성과 닮아 있다. 낯선 언어를 흉내 내고 원곡의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조금씩 ‘나만의 말’을 찾아가던 시절. 우리는 팝송의 영어 가사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며 뜻을 몰라도 마음으로 따라 불렀다. 그것은 서툰 흉내이자 동시에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다. 시즈쿠가 “컨트리 로드”를 부르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한국에서도 그 ‘번안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가수 현미의 데뷔곡이자 히트곡 '밤안개'는 Nat King Cole의 'It’s a Lonesome Old Town'을 번안한 곡이었다. 그리고 번안곡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송창식과 윤형주가 결성한 듀오 트윈폴리오의 '웨딩 케잌'이다. 원곡은 코니 프란시스의 <The Wedding Cake>이다. (김현석 감독의 영화 <쎄시봉>에도 원곡과 다르게 한국적인 서정적 감성의 가사가 번안곡의 매력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외국의 낯선 멜로디가 한국의 정서와 만나며 전혀 다른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번안이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내가 이 노래를 어떻게 느꼈는가’를 새겨 넣는 감정의 재창조였다.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라디오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발음대로 들리는 대로 노트에 적어 내려가며 뜻보다 리듬을, 문법보다 울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이해’의 음악이 아니라 ‘공감’의 음악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를 모르면서도 사랑을, 외로움을, 그리움을 배웠다. 이 영화는 그 시절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즈쿠는 그 가게 사장인 할아버지의 손자와 친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고집스레 부탁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노래를 불러준다면 해주겠다고 승낙한다. 부드러운 그의 연주가 이어지고 시즈쿠는 자신이 번안한 노래 '컨추리로드'를 부른다. 이때 마법 같은 순간이 벌어진다. 때마침 가게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동료들과 함께 그녀의 노래에 맞추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합주를 한다. 할아버지는 첼로를, 친구들은 리코더와 기타를 연주한다. 마치 잘 짜인 뮤지컬의 한 부분 같은 이 장면은 이 영화에 단숨에 활력과 웃음을 불어넣으며 동시에 남자 주인공 아마사와 세이지의 정체를 드러낸다.



4. 판타지와 목표

이 영화는 사춘기의 불안과 설렘, 그리고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가장 섬세한 온도로 그린 성장담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그 시절의 향수에 머물지 않고 한 소녀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순간들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의 떨림과 고독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환상과 현실이 맞닿는 미묘한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시즈쿠의 눈앞에 펼쳐지는 ‘남작 바론’의 세계는 상상 속 판타지가 아니라 그녀의 창작 욕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의 풍경이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을 견디기 위한 내면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잔혹한 무대이다. 그리고 세이지는 이 이야기에 있어 단순한 ‘남자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시즈쿠가 꿈을 향해 발돋움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거울이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 세이지는

나도 두려워.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라고 말한다. 그의 진심은 시즈쿠를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세이지의 결단은 시즈쿠에게 창작의 용기를, 불안 속에서도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사랑할 수 있는 첫걸음을 건넨다.

밤을 새우며 원고를 쓰고, 다시 지우고, 또 써 내려가는 시즈쿠의 모습은 지브리 작품 속 어떤 캐릭터보다 진실하다. 그건 누군가의 칭찬을 얻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으로 빛날 수 있을지를 묻는 치열한 과정이다. 가게 할아버지에게 첫 작품을 보여주며 그녀는 떨리는 숨을 고른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한다.

몹시 거칠고 솔직하고, 미완성이고...
꼭 세이지의 바이올린 같구나.
시즈쿠의 자라나기 시작한 원석을 똑똑히 볼 수 있었어.
허둥댈 건 없어. 시간을 들여 확실히 손질해 줘.

그 말 앞에서 시즈쿠는 끝내 눈물을 터뜨린다. 그것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눈물이다. 허둥대던 시간들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미완성 그 자체로도 누군가의 진심을 울릴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렇듯 이 영화의 판타지는 초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시즈쿠의 이야기 속 바론과 보석들은 모두 내면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불완전함 속에서도 반짝이는 성장의 조각들이다. 시즈쿠는 소설을 완성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목표를 향한 열정이 결코 대단하거나 위대한 것으로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창작이란, 인생이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견디는 일이다. 중요한 건 완벽한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시즈쿠가 바론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미완의 소녀이지만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은 작가로 서 있다.

<귀를 기울이면>은 이렇게 속삭인다. 성장의 순간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껴안는 태도야말로 우리를 진짜 어른으로 만든다고. 시즈쿠의 마지막 미소는 그래서 더 깊다. 그것은 자신을 믿는 이들의 얼굴에서만 피어나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확신의 미소이다.



5. ​창작, 그리고 마음의 성숙


​이 작품이 필자에게 유독 오래 남는 이유는 이 영화의 중심에 ‘글쓰기’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시즈쿠는 어느 날 문득 사랑과 자극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친구의 격려, 짝사랑하는 소년의 도전적인 한마디가 그녀를 흔든다.

나도 뭔가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시즈쿠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모험에 몸을 던진다. 처음엔 열정이 모든 걸 삼킨다. 새벽이 밝은 줄도 모른 채 글을 써 내려간다. 그러나 곧 현실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다. 수업 중 상상의 세계에 빠져 꾸지람을 듣고 집에서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걱정과 잔소리가 쏟아진다. ​오직 아버지만이 그녀의 열정을 이해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며 집중하던 딸의 뒷모습을 기억하기에, 그는 조용히 말한다.

네가 믿는 대로 해보렴.

그 한마디가 시즈쿠의 밤을 다시 밝힌다. 이는 콘도 요시후미 감독이

토토로가 나오지 않는 이웃집 토토로 같은 것을 만들고 싶다.( 출처:/ 『耳をすませば』와 콘도 요시후미 감독 관련 인터뷰, 1995년).

고 밝힌 것처럼,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소중한 가치를 포착하려는 의도와도 맞닿아 있다.


​시즈쿠의 글은 단지 공상이나 낭만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게 할아버지의 젊을 적 경험과 맞닿아 있다. 오래된 골동품 가게에 놓인 고양이 인형 ‘남작’과의 만남은 그녀의 상상력에 불씨를 지핀다. 현실과 환상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맞닿는 순간, 시즈쿠의 글은 하나의 숨결을 갖는다. 판타지는 결코 현실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흘러나온 욕망의 그림자이며 꺾인 꿈이 다른 모양으로 다시 피어나는 공간이다.
​결국 그녀는 소설을 완성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는다. 단지 문장을 다듬는 수준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힘이 아직 모자라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한다. 더 배우고, 더 경험하겠다고. 창작의 끝은 성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아는 것이다.


감독이

아이들을 격려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출처:/ 『火垂るの墓』작화감독・콘도 요시후미 씨와 다카하타 이사오 씨 인터뷰, 1995년 경)

고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청소년의 성장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고 ​이 작품은 글쓰기를 통해 자라나는 한 소녀의 마음을 보여준다. 시즈쿠에게 글쓰기는 치유의 방식이자 성장의 증거였다. 그녀의 문장은 아직 서툴고, 내용은 덜 여물었지만 거기엔 ‘살아 있음’의 온기가 묻어난다. 창작이란 본디 완성보다 ‘진심’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렇게 보면, <귀를 기울이면>은 글쓰기를 빌려 우리 모두의 사춘기를 은유한다. 불안과 열정,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시절. 세상은 시즈쿠에게 “공부나 해”라 말하지만 그녀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결국 그녀가 쓴 이야기는 거창한 소설이 아니라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기장이었던 셈이다.


​지브리 특유의 따뜻한 색감과 오래된 도쿄의 정취는, 그 시절의 마음을 한 겹 더 아련하게 만든다. 그곳엔 허황된 환상 대신, 현실을 바라보며 꿈꾸는 아이의 눈빛이 있다. 어쩌면 창작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다가도 어느새 그 위에 자신만의 별빛을 덧 그리는 일. 시즈쿠는 아직 미숙하지만 바로 그 미숙함이야말로 성장의 증거이며 삶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이다.


​결국 이 작품이 남기는 울림은 단순히 “글을 써라”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속삭임이다. 실패해도 좋고, 아직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용기이다. 시즈쿠가 쓴 소설처럼, 우리 각자의 삶도 아직 탈고되지 않은 초고이다. 다만, 그 문장 사이사이에 진심을 담는다면 언젠가 그 미완의 이야기는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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