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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웜홀, 가을의 중력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by 달빛바람

인간의 웜홀, 가을의 중력

11월 중순이 지나고 첫서리가 얇게 스민 늦가을 오후, 창가에 앉아 따뜻한 숨을 한번 내쉰다. 바람은 가지 끝에서 마른 잎을 떨구고 낙엽은 미세한 기척으로 길 위에 누워 계절의 문장을 바꾼다. 이 계절의 선명한 기울기 속에서 나는 왼쪽 뺨의 작은 흉터를 가만히 만진다. 밝은 빛 아래 옅게 가라앉은 이 곡선은 오래된 필름의 자국처럼 희미하지만, 그 아래에는 시간이 접힌 자리가 숨겨져 있다. 어떤 날에는 그 얇은 틈이 살짝 열리고, 잊어버렸던 소리나 냄새가 다시 스며들어 시간을 비트는 작은 흔들림을 만든다.

나만의 웜홀. 나는 그 흉터를 그렇게 부른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중력을 매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면, 내게는 이 흉터가 과거의 문장을 되감아 붙잡는 중력이다. 손끝이 닿는 순간 현재의 무게는 잠시 가벼워지고, 오래 묻어 있던 기억들이 저마다의 밀도로 되살아난다. 나는 그 힘을 오래전부터 ‘사람의 중력’이라고 생각해 왔다. 따뜻함이 통증을 감싸고, 통증이 다시 사랑을 끌어올리는 힘. 인간의 마음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잡아당기는 작고 결연한 인력.


나의 첫 번째 웜홀은 예외 없이 가장 순수하고 깊은 단내를 몰고 온다. 그것은 시간의 직물에 아로새겨진, 달콤함과 통증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태어났던 어떤 가을날의 오후이다. 여섯 살이 막 지난 나는 부엌 가장 깊은 곳, 엄마의 시선이 닿지 않는 모서리를 탐험했다. 엄마 몰래 설탕을 녹이던 그 오후는 일종의 모험과도 같았다. 묵직하고 차가운 은색 국자 안에서, 눈처럼 하얗던 설탕 알갱이들은 세상의 무게를 잃은 듯 조용히 미끄러졌다. 작은 불꽃이 그 아래를 핥을 때, 그들은 투명한 물로 변했다가 천천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금빛의 점액질로 스며들었다. 이 과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일어났다. 변화의 정점에서, 설탕물은 국자 가장자리에서 작은 기포들을 만들며 숨을 뱉기 시작했다. 황금색 단물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작은 숨결들. 그 신비한 향기에 나는 완전히 홀렸다. 바로 그때였다. 방심한 틈을 타, 끓어오르던 끈적한 설탕물이 작은 조각으로 튀어 올라 내 뺨에 안착했다. 순간, 작열하는 짧고 날카로운 통증이 내 어린 뺨을 스쳤다. 그것은 아주 짧았지만, 너무나 생생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달콤함과 상처가 같은 용광로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우주의 비밀을 몸으로 배운 셈이었다. 곧이어 닥친 엄마의 격렬한 분노는 캐러멜의 달콤한 향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엄마의 목소리는 뜨거운 설탕물보다 더 강한 기세로 나를 꾸짖었고, 나는 서러움과 통증 속에서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밤이 되자, 모든 소음이 물러간 고요 속에서 엄마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약을 바르던 엄마의 손길은 그날 하루의 모든 것들 중 가장 무거운 중력이었다. 톡 쏘는 금속성 소독약 냄새와 연고의 미묘한 화학적인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그 차가운 냄새 아래에서 나는 분노와 엄격함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랑의 가장 깊은 결을 처음으로 느꼈다. 엄마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조심스러운 떨림과 나를 아프게 했던 캐러멜의 단내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던 묵직한 사랑의 온도까지.


몇 해가 흘러, 나의 웜홀은 또다시 '단내'의 변주를 통해 열렸다. 그 단내는 예전의 캐러멜처럼 명랑하거나 순수하지 않았다. 한층 복잡하고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찬 냄새였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져 가던 늦가을의 어느 저녁. 집 안은 촛불과 향의 기척으로 가득했다. 미세한 제사 향이 낮게 거의 소리 없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매캐하고 씁쓸한 나무 향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낮은 불빛 아래, 제상 위에는 흰 떡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떡의 표면에서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쌀의 정갈하고 순결한 단내는 이 모든 침울함 속에서 홀로 깨끗했다. 이 단내는 나를 태우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의 모든 공기를 압축하고 어머니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을 나의 가슴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향 냄새, 촛불의 흔들림, 그리고 떡의 단내가 만들어내는 불길한 조화. 그것은 상실이 찾아오기 전에 미리 보내는 달콤한 경고 같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흰 떡을 입에 대지 못했다. 달콤함이 주는 이중적인 의미에 대한 공포였다. 나를 태우며 사랑을 알려줬던 캐러멜처럼, 이번 단내는 사랑이 있던 자리를 대신 채우며 부재(不在)를 확정할까 봐 두려웠다. 달콤한 향이 언젠가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차가운 대체물이 될까 봐. 나의 웜홀은 언제나 그렇게 단내로 시작된다. 달콤함이 선사하는 통증과 그 통증 속에 숨겨진 가장 뜨거운 사랑의 온도를 기억하며.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가을이 깊어질 때마다 거리에서 풍기는 국화빵과 호떡의 향은 조금씩 나를 바꿔놓았다. 그 따뜻한 냄새는 오래 전의 밤을 떠올리게 했지만 더는 나를 움츠리게 하지 않았다. 상처란 결국 과거를 지우는 대신 가장 아팠던 순간으로 이어지는 문을 하나 더 만드는 법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작은 떡 조각을 천천히 잘라먹는다. 그 너머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마지막 숨결이 가족이 모여 서로의 떨림을 붙잡던 순간이 남아 있다. 혼란스러웠던 의식의 밤은 이제 사랑이 끝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인간의 몸짓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영화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던 날 나는 몇몇 장면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영화 속 사람들은 사랑이 시간의 벽을 넘어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막막한 우주에서도 희미한 길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만으로 어둠을 건너갔고, 또 누군가는 기억의 한 조각만으로 생을 버텼다. 그들을 지탱했던 건 이성이나 계산이 아니라 서로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중력 같은 감정.

주인공 쿠퍼가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어머니가 남긴 중력과 겹쳐진다. 고요함 속에서도 끝내 나를 끌어당기던 그 마음. 멀리 있어도, 시간이 흐르고 사라진 듯해도 결국 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던 힘.

가끔 흉터 위에 손을 얹으면 시간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작은 틈이 열린다. 그 안에서 어린 나는 여전히 울음을 삼키고 서 있다. 뜨거운 설탕물에 놀라 울던 아이, 엄마의 분노에 웅크리던 아이. 나는 그에게 미소로 말한다. 이제는 괜찮다고. 그날의 두려움은 나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흩어진 시간들을 서로 꿰매어준 중력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다시 가을 창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실린 낙엽이 어딘가로 흘러가듯 인간의 상처와 사랑도 결국 같은 자리를 맴돌다가 제자리를 찾아온다. 작은 흔적에서 시작된 마음은 어떤 때는 흙처럼 무겁고, 때때로 별빛처럼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 두 질감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시간이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모든 흉터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사랑이 남긴 좌표라고. 무너짐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빛이며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고 살아 있다는 조용한 증명이라고. 인간 안에 숨은 작은 웜홀들은 결국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가장 인간적인 장치이다.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나를 데려가고 다시 데려오는 중력.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내 삶의 방향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기울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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