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지로 발전하기까지
서양의 문화 예술에서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상당합니다. 서양 문화의 원류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를 보십시오.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유적의 중심부에는 꼭 원형 극장이 하나씩 있습니다. 거기서 공연하던 희극, 풍자극, 및 비극 공연이 그리스 문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시대를 풍미하던 공연 배우들의 이름이 고대 역사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자연히 고대 그리스 및 로마 문명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유럽에 그 영향력이 이어졌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둘째라면 서러워할 만한 인물이 연극작가였던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 아닙니까? 그 영향인지 미국의 어린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학교에서 연극 공연의 경험을 해 봅니다. 그 어린 꼬마들이 공연 후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는 경험을 하며 어린 나이에 연극에 도취되곤 합니다. 그리고선 먹고살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연극계에 투신하지요. 글재주가 있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접합니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겠다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연극 및 영화 극작가의 길을 걷습니다. 영화계에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은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리스 (Los Angeles)로 모이고, 연극 및 뮤지컬에 투신하는 이들은 뉴욕으로 몰립니다. 이들이 뉴욕을, 영국의 런던과 더불어, 세계 연극 및 뮤지컬의 양대 산맥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자연히 뉴욕에서 브로드웨이 연극 및 뮤지컬 관람이 빼놓을 수 없는 관광 코스가 됐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뉴욕 브로드웨이 판도를 크게 흔들었던 작가가 나타났습니다. 린 마누엘 미란다 (Lin Manuel Miranda)라는 뉴욕에서 자라난 푸에르토리코 이민 2세인데요, 작품을 쓰던 시절인 2009년 오바마 전 대통령 내외의 눈에 띄어서 백악관 시 낭송 행사에 초대받았고요, 거기서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한마디 했습니다.
“제가 지금 힙합 음악 작사를 하고 있는데요, 이 음악 장르에 딱 맞는 주인공이 하나 있어서 그를 주제로 쓰고 있어요. 미국 초대 재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알렉산더 해밀턴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면 미국 10불짜리 지폐를 보십시오. 점잖게 생긴 백인입니다. 그런 초대 재무부 장관이 랩과 힙합 음악에 맞는다고 주장하니 자연히 대통령 내외 및 청중들이 웃었습니다.
"어! 지금은 비웃으시죠? 한번 보세요. 해밀턴은 카리브해 작은 섬에서 가난한 사생아로 태어나서 청소년 때 혼자 미국으로 이민 왔어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 되어서 초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됐어요. 신념이 강해서 많은 당시 정치인들과 싸웠는데, 언어와 글쓰기의 천재였기 때문에 미국을 지금의 훌륭한 국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주류 사회에서 무시받는 이민자, 언어의 마술사를 표현하는데 힙합만큼 정확한 음악 장르가 없어요!"
그의 작품이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로 데뷔하기까지 7년이 더 걸렸습니다. 각본이 완성된 후에 가족 및 친구들에게서 열심히 투자를 받으러 다녔고, 어렵게 모은 자금으로 공연배우를 고용했습니다. 이렇게 공연 준비가 됐다고 브로드웨이에 자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기서 브로드웨이 진출이라 하면 뉴욕 미드타운의 타임스 스퀘어 (Times Square) 인근에 있는 객석 500 이상의 대형 극장 41곳 중 하나에서 공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극장들은 엄선된 작품들만을 공연하고요, 새로운 작품들은 일단 객석 규모가 100에서 499인 소위 오프 브로드웨이 (Off Broadway) 극장, 또는 객석 100 이하의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Off Off Broadway)에서 먼저 데뷔를 합니다. 그런 소극장에서 언론 및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으면 그때서야 이 바닥의 큰 손 투자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생긴 투자금으로 프로듀서를 고용하고, 무대 시설에 큰 투자를 하고, 프로듀서의 연줄을 동원해서 브로드웨이의 유명 극장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벌입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 단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린 마누엘 미란다의 뮤지컬 <해밀턴>은 곧장 연극 및 뮤지컬 계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 직후, 다시 오바마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이번에는 배우들과 작가가 다 같이 백악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오바마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소개의 말을 하더군요:
“린 마누엘 미란다가 휴가 가는 중 공항 서점에서 책을 하나 우연히 골랐는데, 그것이 역사학자 론 쳐나우 (Ron Chernow)가 쓴 알렉산더 해밀턴 전기입니다. 이 두껍고 딱딱한 책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봤어요. 가난한 이민자가 미국에 와서, 오직 집념과 노력만 가지고 자신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미국 이민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젊고 배고픈 해밀턴이 성공하는 모습이 미국 초창기 역사를 그대로 상징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데 뒷골목에서 쓰는 반항과 혁명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랩을 사용했고, 그 배경의 비트로 힙합을 사용했습니다.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기막히게 잘 쓰여 있는데, 이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격렬한 논쟁들을 정확히 묘사했습니다. 우리 박수로 린 마누엘 미란다를 환영합시다.”
이 뮤지컬이 랩과 힙합을 쓰는 것과 걸맞게 출연 인물들의 대부분은 흑인 및 히스패닉계 배우들입니다. 애초에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에서 유색인종을 우대한다는 문구를 넣었다가 백인 배우 지망생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인종 역 차별이라고 해서요. 하지만 여전히 해밀턴 배우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입니다. 해밀턴은 실제 백인이었지만 이민자였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의도 때문입니다.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이지만 저 역시 가족과 이 뮤지컬을 관람하러 간 기억이 있습니다. 개봉 이후 일 년이 넘게 표 판매 대행업체들이 천 불을 넘나드는 가격을 불렀습니다. 극장에서 원가에 표를 팔기는 했지만 새벽부터 하루 종일 줄을 서야 살 수 있었고요. 일 년 정도 지나니 인터넷을 통해 아주 가끔씩 극장에서 직접 판매하는 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 표에 이백 불 정도 했던 것 같군요. 직접 뮤지컬을 보니 소문대로 가사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게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배우들이 빠른 템포의 랩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에 영어에 익숙해야 내용을 따라갈 수 있어요. 저희 가족은 그 사운드 트랙을 집에서 열심히 들으며 예습해서 갔기 때문에 그 내용을 즐기며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해밀턴 뮤지컬이 나온 직후 미국에서는 달러 지폐의 도안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쟁이 잠시 있었습니다. 현재 도안에는 백인 남자들만 있는데, 여성과 유색인종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죠. 그렇게 한다면 현재 지폐에 있는 누군가는 빼야 하는 상황인데, 건국의 아버지 워싱턴을 뺄 수도 없고, 노예제를 폐지했던 링컨도 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역임하지 않은 해밀턴을 빼자는 주장이 잠시 있었는데요, 해밀턴 뮤지컬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 주장도 쑥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에 지폐 도안 바꾸자는 이야기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 해밀턴은 미국 이민 후에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Columbia University)의 전신인 킹즈 칼리지 (King’s College)를 다녔습니다. 지금도 컬럼비아 대학교 졸업식 가운에 왕관 심벌이 새겨져 있는데, 킹즈 칼리지 때부터 있던 전통 문양입니다. 당시 학교의 위치가 맨해튼 남단, 지금의 트리니티 교회 (Trinity Church) 옆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해밀턴이 학교를 다니는 와중에 독립전쟁이 터졌습니다. 해밀턴은 전쟁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독립군에 자원해서 맨해튼 남단에 있는 포병 진지, 지금의 배터리 파크, 에서 첫 전투를 경험합니다. 그 이후 조지 워싱턴을 만나게 되는데, 워싱턴이 그의 언변과 글 쓰는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부관으로 삼았습니다.
워싱턴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해밀턴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가 군 예산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요. 왜냐고요? 영국이 홍차에 세금 부과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됐어요. 세금을 못 걷으니 군사 예산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해밀턴이 각 주 정부에 돈 좀 보내 달라는 편지를 잘 쓰면 일부 주에서 채권을 발행해서 적은 돈을 보내왔어요. 병사들에게는 나중에 독립하면 돈을 주겠다는 약속어음 (채권)으로 급여를 주기도 했고요. 이렇게 어렵게 군대를 유지하면서 영국군과 다년간 소모전을 하다가 결국 미국이 승리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물러간 이후에도 세금을 마음대로 걷을 수 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채권이 휴지 조각이라고 판단한 많은 병사들이 증권 중개인에게 자신들의 채권을 십 분의 일의 가격으로 팔아 현금화하는 현상이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 뉴욕의 월가를 걷다 보면 뉴욕 증권거래소 근처의 한 석조 건물에 조지 워싱턴 동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페더럴 홀 (Federal Hall)이라는 건물인데요, 독립전쟁 이후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취임 선서를 한 곳입니다. 지금의 석조 건물은 1800년대 중반에 지은 것입니다. 독립전쟁 직후에는 그 자리에 멋진 목조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해밀턴을 초대 재무장관에 임명했습니다. 해밀턴은 빈털터리가 된 나라의 예산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을까 궁리 끝에 채권을 발행해서 돈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신용이 매우 낮아 웬만한 이자로는 돈을 빌리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낸 아이디어가 다음과 같습니다. 중앙 정부가 각 주와 채권 발행 경쟁을 하면 서로 손해 보니 주 정부의 빚을 다 중앙 정부가 떠안고, 그 대신 채권 발행은 중앙 정부에서만 독점하자. 그리고 우체국 수입을 이용해서 매년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가며 나라의 신용을 올려 보자. 중앙은행도 하나 설립을 하자.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 은행을 모델로 해서 주식을 발행하는 민간 은행으로 만들자. 궁극적으로 투자자들이 미국 채권을 사도록 해야 하니 중앙은행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일정 부분은 미국 채권으로 사도록 규정을 만들자. 이렇게 열심히 아이디어를 냈는데 버지니아 정치인들이 반대를 합니다.
참고로 그 당시 미국의 정치권력은 토마스 제퍼슨을 포함하는 버지니아 사람들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체제를 시작했는데, 버지니아가 당시 투표하는 인구가 가장 많았거든요. 초대 대통령 워싱턴부터 시작해서, 메사츄세스 출신 2대 대통령만 빼고는 3대 토마스 제퍼슨, 4대 메디슨, 5대 잭슨 대통령까지 다 버지니아 출신 정치인이 당선됐습니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제퍼슨과 언변과 글재주로 무장한 해밀턴이 수많은 문제로 부딪혔습니다. 해밀턴 뮤지컬에서 두 주인공이 이 역사적 사실을 해학적인 랩 배틀 (rap battle)로 표현하는데, 제가 기억하는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제퍼슨>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싸워서 이 나라를 세웠다고 독립 선언문에 돼 있어. 어떻게 아느냐고? 그거 내가 썼거든. 그런데 해밀턴 저 사람 그 독립 정신 그 새 잊었나 봐? 버지니아에서 우리는 열심히 땅에 씨를 심고 땀 흘려 수확해서 돈을 벌어. 우린 빚도 별로 없어. 영국 놈들 싫다고 독립을 했는데 영국식 금융제도를 흉내 내서 중앙은행을 만든다고? 뉴욕 놈들은 우리가 정직하게 번 돈으로 돈놀이해서 이득 취하겠다는 거 아냐?
<해밀턴> 제퍼슨 선생, 말은 잘하시네. 그런데 어디서 자유 타령을 하며 탁상공론이야? 세금 안 낼 자유? 흑인 노예 착취할 자유? 너네들이 노예들 착취해서 농사짓고 있지 네가 무슨 직접 땀 흘려 돈 번다고 헛소리야? 우린 지금 현실의 문제를 풀어야 하는 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나라의 신용을 올려놔야 돈을 더 싼 값에 빌릴 수 있어. 그걸 몰라?
그런데 정치란 타협의 연속이라 하지 않습니까? 격하게 싸우다가도 둘이 앉아서 서로 양보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해밀턴이 새 수도 워싱턴(Washington D.C.)을 버지니아 옆에 두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고, 그 대신 버지니아 정치인들이 해밀턴의 재정 계획을 묵인했습니다.
그즈음 해서 뉴욕에서는 24명의 증권거래업자들이 힘을 합쳐서 증권 거래소를 처음 시작했는데 그것이 뉴욕 증권 거래소의 시초입니다. 지금은 월가 옆에 위치한 그리스 양식의 석조 건물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처음 거래하기 시작한 것들이 미국 국채, 미국 연방중앙은행 주식, 뉴욕은행 주식입니다. 셋 모두 해밀턴의 작품이었습니다. 해밀턴의 계획이 대 성공을 거두며 미국이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됐고 연방은행 주식가격이 폭등하면서 이 증권 거래소가 크게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 그리고 여윳돈을 투자하는 자들이 자연스럽게 뉴욕으로 모이게 됐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뉴욕의 월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지로 도약했습니다.
혹자는 자본 시장의 중심지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미국을 선도하는 마이크로소프트 (Microsoft), 애플 (Apple), 구글 (Google), 페이스북 메타 (Facebook Meta), 아마존 (Amazon) 같은 기업들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에 본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뉴욕의 전성기가 지난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십여 년 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가 기업 공개를 모색한다며 뉴욕에 왔을 때 이곳 매체들이 가십성 기사를 크게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저커버그가 실리콘 밸리에서 입고 일하는 청바지와 후드티 차림으로 왔거든요. 뉴욕의 투자은행을 방문할 때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와야 하는데, 캘리포니아의 잘 나가는 기술 개발자들이 기존의 질서를 뒤엎겠다는 거만함의 표시였다며 뉴욕 언론들이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왔으면 우리 관습을 따르라는 뉴욕 월가의 거물들의 코멘트가 뒤따랐습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저커버그는 양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뉴욕에서 끌어온 자본으로 유망한 회사들을 인수 합병하며 덩치를 더 키웠습니다. 시간이 더 흘러 이제 페이스북 자체는 한물 간 SNS로 취급받습니다만, 저커버그는 월가 투자자들 덕택에 인스타그램, 워츠앱 등을 인수 합병하고서 커다란 기업 집단을 거느리는 재벌로 변모했습니다.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쳇 GPT로 유명한 오픈 AI 등을 일찌감치 인수했고요, 구글 역시 유튜브 같은 알짜 기업 다수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뉴욕의 자본시장이 아니고서는 미국을 선도하는 이들 기업이 이처럼 성장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해밀턴의 뮤지컬이 딱딱한 정치 경제 이야기만 있었다면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뮤지컬은 그가 온갖 역경을 딛고 영웅으로 떠오르는 과정, 그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슬픈 최후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랩 음악에 어울리게 정치적 라이벌들과는 정말 치열하게 논쟁하는 장면이 계속 묘사됩니다. 이 극의 후반부에서 그의 정적이 더 이상 모욕을 참지 못하겠다며 결투를 신청하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긴장을 합니다. 중간에 중재하는 사람들이 협상을 시도하는데, 해밀턴은 사과를 끝까지 거부하고 결투 신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약속된 날 새벽 그는 가족에게 얘기도 않고 나룻배를 타고 뉴저지의 약속된 결투장으로 갑니다. 카리브해의 고아로 시작해서 역경을 딛고 미국 건국의 영웅으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해밀턴이라는 풍운아는 그날 그 정적의 총탄 한 발에 47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뮤지컬이 끝날 즘 슬픈 음악이 나올 때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영웅의 활약상과 사랑, 그리고 슬픈 최후를 묘사한 것이 그리스 시대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비극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서양 공연 문화의 새 중심지가 된 브로드웨이의 정점에 서게 됐습니다.
맨해튼 남단 월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지점에는 트리니티 교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앞마당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수백 년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침식된 비석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그중 한 비석에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간혹 보입니다. 해밀턴 뮤지컬 열풍이 몰아 친 후 더 잦아진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