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상인 정신에서 출발한 뉴욕의 내러티브
제가 뉴욕대학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돼서, 그 당시 대학 총장이던 존 섹스튼 (John Sexton) 박사가 신임 교수들을 불러서 간담회를 했습니다. 그의 훌륭한 언변을 들으며 아무나 총장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뉴욕대학교 총장이 되기 전에 이곳 법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더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법학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이전부터 위대한 종교, 위대한 국가, 위대한 학교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열심히 생각해 봤습니다. 거기에 공통분모가 있어요. 모두들 자손 대대로 전해지는 탄생 신화가 있고, 또 거기에서 파생하는 중요한 내러티브(narrative)가 있어요. “인간을 창조해 놨더니 이것들이 자꾸 죄를 짓는데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신 신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가 기독교의 주된 내러티브인데,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어요. “전제 정권의 통치에 항거하며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민주공화국을 만들었다” 가 미국의 건국 신화인데, 이 역시 전 세계가 호응해서 미국식 민주주의가 선진국들의 정치 근간이 됐어요. 학교도 위대해지려면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러티브가 필요합니다. 제가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어요. 우리 합심해서 훌륭한 내러티브를 만들어 봅시다.”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 뉴욕도 물론 독특한 탄생 신화가 있습니다. 헨리 허드슨이라는 영국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중국 및 인도에서 향신료를 수입하면 떼돈을 벌 수 있던 16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탐험가입니다. 그는 그 당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아시아로 가는 것보다 더 쉬운 항로가 어디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엔 영국의 무역회사에서 투자를 받아 러시아 북쪽으로 항해를 시도했는데, 일 년 열두 달 바다가 얼어 있으니 성공할 수 없었지요. 실패가 거듭되면서 영국 무역회사가 더 이상 돈을 대지 않자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찾아가서 투자를 받습니다. 영국인이지만 네덜란드를 위해서 일하게 된 것이지요.
네덜란드 투자자들은 중국에 가는 더 짧은 항로가 있을 가능성에 베팅하고자 했습니다. 지구는 둥그니, 서쪽으로 항해를 하면 이론적으로는 중국에 갈 수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들 있었지요. 그래도 아메리카 북쪽 어딘가에 아메리카를 관통하는 “북서 해로 (Northwest Passageway)”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소문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후원으로 캐나다 및 미국 북부 해안을 탐험하게 됐고, 그 와중에 1609년에 뉴욕 항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가끔씩 뉴욕을 방문하는 손님을 안내할 때가 있습니다. 단골 코스로 맨해튼 (Manhattan) 최남단에서 스태튼 아일랜드 (Staten Island)를 왕복하는 통근 페리를 타러 갑니다. 이 배가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뉴욕 항 (New York Harbor)을 가로질러 항해합니다. 맨해튼 남단의 고층 건물들은 좁은 길을 따라서 빽빽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막상 그 지역 안에서는 건물 스카이 라인을 감상하기 힘들지요. 이 배를 타면 그 맨해튼 남단의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막힘없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뉴욕 항 한가운데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사방이 육지로 막혀 있습니다. 서쪽에는 뉴저지, 동쪽은 브루클린, 북쪽은 맨해튼입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스태튼 아일랜드와 브루클린이 버티고 있어서 망망대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남쪽의 육지 사이에 위치한 베라자노 (Verranzano) 해협을 지나야 만 대서양이 나옵니다. 사방의 육지가 대서양에서 밀려오는 거친 파도로부터 배들을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해 온 선박들은 지금도 베라자노 해협을 통과해서 뉴욕 항에 들어선 후에야 앵커를 내리고 예인선을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헨리 허드슨과 그의 네덜란드 선원들이 이곳의 입지를 눈여겨보고 맨해튼 섬 남단에 정착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뉴 암스테르담 (New Amsterdam)이라 명명했습니다. 마을의 북쪽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침입을 막는다고 북쪽 경계에 성벽을 만들었는데요, 그 성벽을 나중에 헐고 만든 길이 그 이름도 유명한 월가 (Wall Street)입니다.
헨리 허드슨이 맨해튼까지만 왔다 간 것이 아닙니다. 맨해튼 서쪽과 뉴저지 사이로 흐르는 강은 그의 이름을 따서 허드슨강이라 불리는데, 이 사람이 열심히 탐험한 곳 중 하나입니다. 왜 북서 해로를 찾던 헨리 허드슨이 왜 이 강을 주목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허드슨강이 강이 아닌 해협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말이 안 된다고요? 지금의 월가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1970년대에 새로이 땅을 매립해서 만든 동네, 배터리 파크 시티 (Battery Park City)가 나옵니다. 월가 지역은 빽빽이 지은 고층건물들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 조금은 우중충한 느낌인 반면, 배터리 파크 시티는 녹지가 제법 많고, 강가를 마주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많아 쾌적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서 뉴욕 허드슨강을 관찰하기 좋은데, 유심히 보면 물길이 바다 조류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밀물일 때 바닷물이 역류를 하니 물맛이 짭니다. 얼마나 멀리 바닷물이 역류하느냐고요? 허드슨강이 꽤 평평한 지형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200킬로 이상 상류에 위치한 알바니 (Albany)까지 물길이 바다 조류의 영향을 받습니다. 물길이 하루에 두번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고 17세기 항해사들이 이것은 강이 아닌 해협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헨리 허드슨은 강 상류를 향해 탐험을 계속했고, 결국 이 강은 허드슨강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물론 허드슨강은 북서 해로가 아님이 판명됐지요. 허드슨은 다시 북서 해로를 찾겠다고 얼음이 가득한 캐나다 북쪽 바다를 무리하게 항해하다가 결국 그 선원들의 선상 반란을 맞게 됩니다.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붙잡아 심문하니 허드슨 베이 (Hudson Bay)라는 캐나다 북부 얼음이 가득한 바닷가에 헨리 허드슨과 그의 청소년 아들을 내리게 하고 유럽으로 돌아왔다는 진술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허드슨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처음에 북서 해로를 찾겠다는 목적으로 뉴욕에 왔지만 이들을 뉴욕에 남게 한 것은 비버 (Beaver) 가죽입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모자 및 코트에 사용되는 가죽 제품 중에서 비버 가죽이 단연 최고 인기였는데 원주민들에게 유럽 산 무기와 바꾸는 물물교환을 하면서 많은 네덜란드 무역업자들이 큰돈을 벌게 됐어요. 네덜란드인 정착촌이 뉴 암스테르담을 넘어 허드슨 강 유역에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이 지역을 뉴네덜란드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제가 교수된 지 얼마 안 돼서 뉴잉글랜드의 한국인 과학자 단체에서 조그마한 상을 받고 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고맙게 상을 받는데 누가 뒤에서 “뉴욕은 뉴잉글랜드가 아니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뉴잉글랜드라 하면 코네티컷, 메사츄세스, 로드 아일랜드, 뉴 햄프셔를 포함하는 미국 동북부 지방을 이야기하는데요, 뉴욕은 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같은 동북부인데 왜 이렇게 구분을 하느냐고요? 일단 탄생 신화가 다릅니다. 뉴잉글랜드 하면 영국 청교도 출신들이 개척한 곳이지요. 청교도라 하면 꽤 보수적인 기독교 종파입니다. 이교도는 말도 할 것 없고 가톨릭 및 영국 성공회와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집단이었고, 1600년대 미국에서 마녀 재판을 많이 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뉴욕을 비롯한 네덜란드는 식민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일단 네덜란드가 인구가 적으니 무역업을 하는데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어요. 1600년대 뉴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전체 인구 중 절반 가량만이 네덜란드인, 그리고 나머지는 세계 각지에서 돈 벌겠다고 온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도 있었고 검은 피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인종간 갈등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종교와 인종이 달라도 같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뉴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가치관이 뉴잉글랜드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어요.
뉴 암스테르담이 비버 가죽 무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다 보니, 네덜란드와 패권 경쟁을 하던 영국 군대가 이곳을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664년 요크 공작 (훗날 영국 왕위에 오르는 제임스 2세) 이 뉴 암스테르담으로 해군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일단 브루클린에 상륙하고 뉴 네덜란드의 항복을 요구해 왔습니다. 당시 총독은 다리가 하나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피터 스타이바센트 (Peter Stuyvesant)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장교 출신으로 네덜란드 식민지를 사수하기 위해 스페인과 싸우다가 다리 하나를 잃은 상이용사였습니다. 영국군에 포위 됐다고 쉽게 항복할 인물이 아니었지요. 총독은 곧 마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영국 놈들이 뉴욕 항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항복하라는 같잖은 소리를 한다. 잘 들어라, 내가 뉴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여기 시민들에게 명령한다. 이 도시에 있는 마지막 건물 하나 박살 날 때까지 우리는 이곳을 사수한다. 알았나? 다들 무기를 들어라.”
며칠 뒤 대화로 풀어 보자며 영국 측 인사가 배를 타고 총독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총독 관저에 들어가 편지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궁금해서 관저 밖에 모였는데요, 그 안에서 고성이 오가길래 몇 사람이 들어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총독이 마구 화를 내며 영국인이 전한 편지를 찢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편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더니, 총독은 더욱 화를 내다가 갈기갈기 찢은 편지를 땅에 팽개쳤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하나가 그 찢어진 편지를 다시 짜 맞추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엔 영국군의 메시지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다면 뉴 네덜란드 시민들이 이곳에 계속 거주하면서 생업을 이어갈 권리를 보장하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도 그대로 지킬 수 있도록 할 것이고 여느 영국인처럼 자유로운 통행권도 보장하겠다. 최후통첩이다. 더 이상 관용은 없다. 지금 순순히 항복하라.”
뉴 암스테르담 주민들은 대부분이 돈을 벌 목적 하나만으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 절반은 네덜란드 출신도 아니었어요. 이 편지 내용이 알려진 후에는 “비버 가죽 무역 계속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왜 네덜란드를 위해 죽어야 하느냐”는 의견이 대세가 됐습니다. 결국 싸우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총독도 결국 총 한방 안 쏘고 영국에 항복하게 됩니다. 도시의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바뀌게 됐고 스타이베산트 총독은 네덜란드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일 년 후 스타이베산트 또한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영국이 재산권을 보장했으니 뉴욕에 있던 자신의 농장이 그대로 있었어요. 그 농장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지금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 술집과 문신 새기는 업소들이 유독 많은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 (St Mark’s Place) 인근에 작은 앞마당이 있는 성공회 교회가 있습니다. 그 한쪽 벽면에 박힌 벽돌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에 뉴네덜란드와 네덜란드 서인도 제도 소속 뉴암스테르담의 총독이었던 페트루스 스타이바센트가 묻혀있다. 서기 1672년 사망. 향년 80세”
뉴욕의 지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One World Trade Center) 전망대입니다. 월가 및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 터미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 1970년대 세워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 두대를 납치해서 그 두 건물에 자살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그 두 건물이 한동안 불에 타다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 되면서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그 때문에 미국이 알카에다를 물리치겠다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무너진 두 건물이 있던 위치에는 추모 기념 시설을 만들었고 새로이 원 월드 트레이드를 지었습니다. 새로 지은 그 건물 꼭대기 전망대를 향하는 고속 승강기의 사면이 전광판으로 되어 있는데, 그 화면에서 뉴 암스테르담부터 시작하는 뉴욕의 역사 영상을 보여줍니다.
꼭대기 전망대에서 남쪽을 보면 자유의 여신상이 보입니다.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베라자노 해협을 들어서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이 나라에 입국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아직도 최고의 영화로 꼽는 <대부> 2편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릴적 이탈리아에서 이민 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이민자들을 실은 배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그 옆에 위치한 엘리스 아일랜드에 정박합니다. 엘리스 아일랜드에 있는 이민국 관리가 이름을 물어보는데, 영어를 못하는 비토라는 이름의 소년이 “이탈리아 코를레오네 마을 출신이에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듣고 이민국 관리가 입국 서류에 이름을 “비토 코를레오네”라고 기재합니다. 미국판 창씨 개명 장면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대학원 생활 시작하며 백인 학생들과 대화 중에 무심코 “너희 조상들 메이플라워 (May Flower) 타고 영국에서 왔잖아”라고 한마디 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 그런 사람들 없어” 하는 썰렁한 대답이 돌아와 의아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제는 뉴욕의 백인 사회의 주류가 된 유태인, 아일랜드계, 이태리계 사람들은 대부분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반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이민한 사람들의 후예들입니다.
이처럼 국경을 넘나들며 상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만든 도시가 뉴욕입니다. 탄생 신화가 이러하니 정치, 종교,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시장에서 돈벌이를 추구하는 곳이라는 내러티브가 만들어졌어요. 일단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인종이 다양합니다. 그리고 세계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섹스튼 총장 말 대로 탄생신화와 내러티브가 중요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