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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Apr 06. 2024

영화 헤어질 결심이 부른 가벼운 다짐.

-중년의 내게 사랑이란.

 한국 영화. 다른 사전 정보는 없다. 일단 컴퓨터 스크린을 켜고 영화를 봤다. 마침내.

영화 속 배우는 박해일, 탕웨이. 감독은 박찬욱. 영화를 다 보고 초록창을 검색해보고 나서야 배우와 감독을 알아볼 만큼 나는 영화에 무지했다. 아이를 낳고 영화를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매주 남편과 영화를 보러 다니던 나는 어느 순간, 영화만 보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잠이 들어버리는 아줌마가 되었고 한 시간 남짓한 영화도 공감하며 끝까지 보기가 쉽지 않았다. 십 년이 넘는 기간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한’ 이유는 피곤함과 회피. 정성스레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극장 혹은 거실은 평소 불면증으로 잠을 푹 자지 못하는 커피 중독자 워킹맘에게 늘 짧은 단잠을 선사했고 현실도 피곤한데 굳이 찾아 복잡하고 머리 아픈 사연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누군가 칼에 베이면 마치 내가 베이는 듯 생생한 감각도 ‘보기’를 ‘포기’하는 일에 한몫했다.


 그런 내가 올 초에 영화를 보고 에세이를 쓰는 강좌를 덜컥 들었다. 특별하진 않지만 내밀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복잡한 마음이 좀 단정해질 거라 기대했다. 당시 영화보다 좋은 수면제는 없던 터라 영화를 보다 잠이 들면 어떡하나, 여러 번에 나눠보다 흐름을 놓치면 에세이도 못 쓸 텐데 걱정하며 처음 시도한 영화 헤어질 결심.


 가볍게 영화를 보자고 결심했는데 경찰 해준(박해일)이 서래(탕웨이)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수사를 제대로 ‘안 한’ 자신이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울컥. 자신이 품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는데, 그 자부심도 품위도 사라진 자기는 ‘붕괴’되었다고 하며 서래에게 사건의 증거가 되는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말하는 장면. 붕괴라는 단어가 유독 내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젊은 형사도 달리다 포기한 범인을 잡으려고 유독 ‘발라서 내겐 다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던 자세’로 끝까지 달리던 해준의 모습이 겹쳐서다. 그 모습이 워킹맘으로 개미처럼 살아온 내 날들. 최근 몇 년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붕괴된 멘탈을 부여잡으려 안간힘 쓰던 내 모습이기도 해설까. 열심히 살려고 분투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우스꽝스럽게 비치기도 하고 그러다 붕괴도 되고. 그게 삶인가보다 잠시 먹먹했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떠난 후 해준을 사랑하게 됐고 그 사랑은 해준이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한 휴대폰과 자신을 함께 바다에 묻어버리며 끝이 난다. 아니. 서래가 원하던 방식으로 두 사람의 끝도 없는 안타까운 사랑은 ‘마침내’ 시작된다. 미제사건 관련 사진들을 벽에 붙이고 자주 바라보는 해준의 습성을 알던 서래는 자신이 해준의 미제사건이 되어 해준이 죽는 날까지 자신을 떠나지 않기 원했고 해준은 그럴 테니까. 뭘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랑할까 의아해진다. 영화, 노래, 소설,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사랑이 뭐더라 갑자기 헷갈린다. 찾아보니 사전에서는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해준과 서래의 사랑과 헤어질 결심이 안타깝고 슬펐지만 질문이 쏟아졌다. 감독은 혹은 작가는 왜 이런 사랑을 그릴까. 같이 강좌를 듣던 젊은 처자는 해준과 서래의 절절한 사랑과 그 사랑을 그려낸 감독을 극찬했다. 하지만 난 공감하기 어려웠다.


 분명 나도 해준과 서래처럼 사랑했던 적이 있다. 절절해서 무겁고 아팠던 사랑. 그래서 나를 쳤던 사랑.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유행가 가사 대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건 그저 결핍이 빚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적어도 사랑은 서로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 상대방을 아끼되 나를 파괴하지 않는 것. 박찬욱 감독은 ‘어른들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겉모습은 빼박 어른인 내게 영화 ‘헤어질 결심’이 그린 사랑은 더 이상 해보고 싶지 않은, 할 수 없는 사랑의 형태다. 설사 그 절절함이 감정을 잠시나마 흔들어놓긴 했어도 상대로 인해 나의 존재가 ‘붕괴’ 된다면 그건 내게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내가 망가져서 인류를 구하게 된다면 또 모를까. 그런 류의 숭고한 희생도 사랑의 범주에 든다면 말이다. 중년의 내겐 서로의 마음에 꽃을 피우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제는 그런 사랑을, 그런 사랑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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