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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Apr 06. 2024

우리 그냥 이 시간을 잘 보내자.

-개 딸 몽실이와 산책 하다 떠오른 옛 친구 복덩이를 추억하며.

 딸이 둘 있다. 사람 딸과 개 딸. 사람 딸은 사년 째 사춘기. 표현할 수 없는 괴상한 생물체로 돌변한 아이 덕에 천국과 지옥을 숱하게 오갔다. 무단결석으로 우리 부부뿐 아니라 담임 선생님 역시 애타게 만든 딸은 오랜만에 본 담임 선생님이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도 무시. 학교도 안다니는 것이 화장은 또 어찌나 짙게 하고 나타났는지. 학교에 나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에도 무심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아이 모습에 남편 얼굴이 달아올랐다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개 딸이 있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개 딸.


 부랴부랴 퇴근 후 남편에게 우리 개 딸 몽실이 산책도 시킬 겸 벚꽃 구경을 가자했다. 만개한 벚꽃을 보면 사람 딸 때문에 구겨진 부부의 마음이 좀 펴질 거라 기대하며. 저녁 공기가 싸늘해 노란 옷을 꺼내들자 지 옷인 줄 안 몽실이가 작고 고른 치열을 환히 드러내며 폴짝폴짝 뛰었다. 남편과 그런 얘길 한 적 있다. 몽실이가 학교에 다니면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방 챙기고 학교에선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배움에 열중할 거라고. 유독 활달하고 바른 성격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을 거라고. 우스갯소리였지만 지금도 내 옆에서 동그라니 몸을 말고 누워 있는 몽실이는 우리 부부의 허전함을 참 많이도 달래줬다. 껌 딱지 같던 딸이 돌연  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 아빠를 밀어내기 시작했을 때, 공교롭게도 고맘때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데려온 몽실이의 존재가 이리 커질 줄, 우리는 미처 몰랐다.


 사년 전, 딸이 고집을 부렸다.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아이가 우렁이, 소라게, 기니피그를 데려와 집에서 묘한 가축 냄새가 난지 오래지만 강아지만은 안 된다 잘랐다. 복덩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복덩이는 초등학교 때 같이 살던 발발이다. 시골집엔 피리를 불면 아우-하며 같이 목청을 높이던 검둥이도 있었고 세상 미련한 누렁이도 있었다.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게 털이 복슬복슬한 튼실이도 있었지만, 복덩이만큼 충만한 사랑을 내게 선물한 개는 없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복덩이가 나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빠가 꼬물거리는 흰 색 새끼 강아지를 데려왔고 검고 순한 눈망울에 그 아이와 오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따뜻한 아이를 가만히 안으면 지금 딸처럼 사춘기였던 내 마음도 포근히 가라앉는 느낌이 좋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겨울 밤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복덩이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외로움을 달래던 장면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마을버스 차비를 아껴 복덩이 간식을 사 하교하는 날, 동네 어귀에서 복덩아~부르면, 복덩이는 말 그대로 눈썹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달려와 나를 맞았다. 당시만 해도 시골동네에선 개를 풀어놓고 키워, 등하굣길에 매일 나를 배웅하고 마중하던 복덩이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뒷마당 난초와 꽃나무 이파리에 서리가 내렸던 늦가을 아침. 학교 가려 집을 나서기 전 시름시름 앓던 복덩이를 불렀다. 아픈 몸을 겨우 일으켜 내게 오는 복덩이를 안고 뒷마당으로 가 잠시 쓰다듬어주며 학교 끝나면 간식을 사다주겠다 달래던 차, 복덩이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경련했다. 당시 몰랐지만 단말마였다. 쪼그려 앉은 내 무릎 위에서 눈뜬 채 무지개다리를 건넌 복덩이를 내려다보며 울컥 솟는 눈물을 삼켰다. 믿고 싶지 않았다. 집 근처 밭에 아이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주면서도 복덩이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애도하는 시간은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졌던 존재 가치에 따라 다르다. 내겐 복덩이와 함께 한 시간보다 복덩이를 애도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복덩이가 나를 마중하던 장소는 한참동안 그 아이가 없는 헛헛함과 쓸쓸함을 안겨줬고, 겨울밤 하늘에 뜬 총총한 별을 헤며 복덩이는 틀림없이 저 별 중 하나라 되 뇌이며 잘 있냐고 안부를 물었다. 내가 별나라로 가면 다시 만나자고. 다시는 가까운 생명을 곁에서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영원히 개를 키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후 우리 집에 개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개를 소 닭 보듯 했을 뿐이다. 정을 주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삼십년 이상 절대 개를 마음에 들이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결국 몽실이를 들였다.


 우리 집 몽실이는 털이 몽실몽실해 하얀 털실 뭉치 같은 것이 잠깐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 들어오기만 해도 빙글빙글 껑충거리며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반가운 손님인 듯 나를 반긴다. 나의 부재가 고작 30초 정도로 짧아도 격렬한 반가움의 표현엔 예외가 없다. 마음이 시끄러운 밤. 그 따뜻한 털 뭉치를 가만히 안고 천천히 숨을 고르면 몽글몽글 솟아나는 따뜻한 기류에 하루치 시름이 스르륵 사라진다. 침대건 바닥이건 어느새 엉덩이를 들이밀며 옆에 와 있는 이 하룻강아지는 왜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리 온전히 믿을까. 가끔 궁금하다. 물론 몽실이가 마냥 예쁘기만 한 건 아니다. 물어뜯어 망가뜨린 이불만 몇 채인지 모르고 원하는 걸 안 들어주면 여기 저기 똥을 싸는 행패를 부린다. 삐지면 불러도 본체만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치킨이라도 뜯고 있으면 옆에서 눈가가 촉촉해지는 연기를 펼쳐 보는 사람을 어이없게 한다, 나와 딸과 남편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인기관리를 하고 앞발로 툭툭 차며 계속 놀아달라고 어깃장을 놓다 혼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우리 세 식구 모두를 참 온전히도 사랑해준다. 아무 계산도 없는 몽실이의 순수한 사랑을 받다보면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사랑이 하찮아지기도 한다. 삼 킬로그램 남짓한 몸으로 최선을 다해 열일하며 살고 있는 몽실이. 몽실이와 환하게 핀 벚꽃 길을 걸으며 잠시 복덩이를 생각했다. 잘 있냐고. 몽실이 덕에 너를 다시 추억할 수 있어 좋다고 전하는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산책길. 거리가 멀어지자 뒤돌아서 나를 기다리는 몽실이에게 다가서며 결심한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을 누가 알겠냐고. 그저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시간. 이 시간을 잘 보내 보자고. 그러다 보면 정상범주에서 한 참 벗어난 사람 딸도 제자리를 찾기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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