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은 딸 학교에 중간고사가 있는 날이다.
책에 있는 글자와는 담 쌓고 사는 아이라 오늘 아침에도 메이크업 30분, 드라마 시청 1시간 정도 후 느지막이 등교하고 일찍 하교했다.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형편이라 아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딸이 중간고사 기간에도 화장하고 나간다며 지인이 속을 끓인 적이 있다. 당시 지인을 위로하며 요즘 애들은 참 다르다 싶었는데 우리 딸은 뭐. 지인의 딸과는 비교불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떡볶이를 주문해 달라며 또 TV를 켜고 거실에 앉는 딸에게 뭘 보냐고 물었다. <조선정신과 의사 유세풍>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드라마를 꿰고 있는 남편과 달리 TV를 잘 안보는 나지만, 근래 딸과 보내는 시간, 남편과 보내는 시간을 부러 늘리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종종 같이 보려 노력하는 중이라 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배달된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데 딸을 잃은 엄마가 울화병에 걸려 가슴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안색이 거무죽죽한 게 병색이 완연한 중인 출신 엄마는 딸을 잃었는데도 양반 가문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위로 한 마디 못 받고 괄시를 당했다. 슬픔과 분노가 쌓여 결국 병이 났다.
마음의 병은 보이지는 않지만 적절히 치료받지 않으면 개인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무시하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은 실제 몸 여기저기에 원인 모를 통증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사고방식이 늘 자신을 해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어느 책에서 소위 마음의 병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 잘 걸린다고 했다. 적절한 약을 처방받아 병증을 치료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이게 참 쉽지가 않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생채기가 몸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딸을 데리고 병원, 상담소를 전전했지만 약물도 상담도 크게 소용이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 덕분일까? 드라마에서 울화병에 걸린 여인을 치료하는 과정에 뼛속 깊이 공감 갔다. 병을 만든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 즉 죽은 딸을 만나 그간 쌓인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고 남편에게 억눌렀던 화를 표출하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억누르던 사고방식을 바꿔 스스로를 질곡에서 해방 시키는 것. 이 과정을 거치며 환자는 자신의 울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건 환자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 돕고자 하는 타인의 존재다. 환자는 말 그대로 아픈 사람이므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힘을 잃은 상태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의 마음이 망가진 원인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다 애먼 삽질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보다 더 어리석은 나의 모습을 깨달은 점이다. 보이지 않는 병이라 아이의 병증을 가볍게 봤고 때로 질책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자꾸 불행을 선택했다.
드라마에서 치료가 된 환자를 보내며 의사가 마지막 인사말을 한다.
“불행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행복할 기회만 잡으십시오.”
딸에게 대사를 다시 읊어주며 스스로도 반성했다. 불행과 불안으로 자꾸 치닫는 나의 마음 방향도 될 때까지 돌려보자 다짐했다. 혹시 아는가. 마음이 선순환하면 예기치 못한 좋은 일이 찾아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