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제법 자랐다. 물 속에 빼꼼히 내밀던 어린 모들은 이제 꼳꼳하게 서서 햇볕을 머금고 초록논 물결에 힘을 보탠다. 장마가 오려는지 습한 공기가 끈덕지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밤꽃의 향기를 머금고 아직은 시원함이 묻어 있다. 요즘 황혼 녘에 산책을 나서기 아주 좋은 때이다. 그런데 이런 유익한 발걸음을 사로 잡는 유혹이 있으니 바로 ‘야구’란 녀석이다.
운동이라면 뭐든지 편식하지 않는 막둥이가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야구 경기를 보기 시작하면 곁에 서서 보다가 눌러 안고 만다. 그리하여 야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산책을 나서려 옷을 입고서는 주저 앉은 적이 꽤나 많다. 어찌나 아는 것이 많은지 선수들 이름이며, 규칙이며, 응원가에 해설까지 입이 쉴 틈이 없다. 지난 주말에 출전 했던 펜싱 경기에도 이런 열의가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햇병아리 수준이라 칼을 노련하게 휘두를 수 있는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몇 차례 찔림을 당하고 뒷걸음 치고 고개를 숙였다.
두 어 달 전에 처음 출전했던 경기 때는 그저 지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던 일이라면, 지금은 본인의 실력에 대한 정직한 판단으로 주제파악을 잘 해서 허황된 메달의 꿈을 갖지 않고 출전에 의의를 두었었던 터라 패배해도 울지 않았다. 지는 법을 배우는 게 쉽지 않다. 당당하게 물러 설 줄 아는 겸손함을 갖춤이 쉽지 않다. 승자에게 축하해 줄 줄 아는 성숙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쉽지 않음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남편과 나는 그래서 지기 위해 또 출전을 허락했다. 대신 막둥이에게 일러두었다.
“너는 이기러 나가는 것이 아니야. 지난 번 경기 때 보았듯이 너의 수준은 아직 누군가를 이기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메달에 가까이 가기에는 시간이 필요해. 실력을 쌓기까지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까지 지러 나가는 거야. 당연히 예선도 쉽지 않겠지만 지더라도 울지 않기.”
막둥이는 예선 탈락을 했다. 1조로 배정되어 6명의 선수와 경기를 치렀고, 그 여섯명 중에는 지난 번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도 있었다. 지난 경기 때보다는 아이의 태도가 훨씬 진지했고, 실력도 아주 조금 나아졌다. 물론, 5대 0으로 패배한 예선전도 있었지만, 어이없는 참패는 아니었다. 꽤 열심히 자기보다 더 나은 상대들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고, 공격을 시도했고, 방어도 해보았다. 체력으로 따지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과 집중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실력이 갖추어지면 겨룰만할 거라는 것을 아이도 나도 알고 있기에 지는 순간에도 억지의 억울함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삼진 삼구! 나이스!”
그 옆에서 큰 녀석은 병든 닭처럼 졸고 있다. 큰 아이는 요즘 기말고사 시험기간이다. 4월말 중간 고사를 마친 후, 소풍을 간다고 잠을 설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멀게만 느껴졌던 7월 초의 기말고사가 바로 코 앞이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요즘 가는 시간을 돈을 주고라도 사서 통장에 넣어두고 싶은 심정이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다녔던 이십년 전, 남편과 교회 차량 봉사를 했었다.
시애틀 다운타운에 사시는 노인분들이 꽤 많으셨다. 담임 목사님께서 교회를 개척하셨던 곳이 시애틀 다운타운이었고, 교회의 터를 사서 지은 곳은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FederalWay라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교회가 이사를 오고 난 후로도 원년 멤버이신 권사님들께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찾아 오셨다. 물론, 차량으로 모시고 오는 것이지만 연세가 보통 일흔 중반에서 여든, 아흔도 넘으신 분들이 꽤 있어 쉽지 않은 발걸음이기에 그분들께서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을 알아 기쁘게 봉사했었다. 그때,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50년에서 60년 최고로 70년까지의 나이 차이가 나는 어르신들과 대화할 수 없었다. 그저 인생 대 선배들 사이에서 조용히 대화를 들을 뿐이었다.
“몇 살이랬지?”
“스물 여섯입니다.”
“뭐라고?”
“스물 여섯입니다.”
“아이고 젊어라. 그 때는 시간이 더디게 가지? 난 90마일로 가고 있다오.”
“네?”
“스무살 때는 20마일, 서른 살엔 30마일, 일흔에는 70마일, 아흔에는 90마일.”
역시 미국에서 오래 사신 분이라 속도도 마일로 계산하신다 생각했었다. 90마일이면 144.8km. 얼마 전, 부상에서 복귀한 오타니가 던진 공의 속도가 97마일이었다지. 메이저리그 잘 나가는 투수가 부상 후 복귀해서 던진 공의 타구 속도가 97마일인데 이 어마무시한 속도로 시간이 가고 있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커가고 있는데 마음이 급해지는 탓이다. 해놓은 거라고는 대출뿐인 집 밖에 없는데 말이다. 안간힘을 쓰려고 해도 시간보다 앞서 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야구를 보고 있으니 자꾸 시계를 보게 되었다. 운동은 고사하고 산책이라도 해야 콜레스테롤을 낮추든지 소화를 시키든지 할 텐데….
“엄마!”
별안간 놀란 토끼 눈을 뜨고서는 큰 아이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제 방으로 갔다. 무얼하나 슬며시 들여다 보니 책상 앞에서 졸고 있었다. 아이를 깨우려는 손이 멈짓했다. 그러고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에게 무얼 가르치고 있는 걸까?
시간이 이렇게 아까운 지금, 나는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치고 있는 걸까?
에어컨이 켜진 사무실에서 반팔에 드러난 살갗에 토시를 껴보기
장마철 되기 전에 이불을 정리하기
비오는 날에 창 틀 닦기
냉장고를 청소할 때는 냉장고 문에 붙은 고무패킹 사이 틈 닦기
세탁할 때 세제와 과탄산소다를 섞어서 식초를 사용하여 살균하기
세균이 잘 끼는 도마의 틈사이 잘 닦아서 건조하기
집에 쓰레기통을 많이 두면 쓰레기가 더 넘쳐나니까 쓰레기통은 한군데만 두기
운동화 끈은 앞으로 매는 것보다 옆으로 매는 것이 덜 풀리지
수박은 껍질째 보관하면 세균번식이 쉬우므로 잘라서 통에 담아서 보관하고
물러버린 야채나 과일은 얼른 분리해야함 안그러면 물러짐이 유행처럼 번지니까
세제와 락스가 섞인 세제로 행주를 빨아 말리면 냄새가 나니까 락스만 사용하는게 좋고
화장실 청소시 뜨거운 물로 마무리해주면 빠르게 건조되고
운전할 때 슬리퍼 신으면 미끄러져 사고날 수 있음을 꼭 명심하고
된장찌개를 끓일 때 참치액을 조금 넣으면 맛있고
여름일수록 뜨거운 물 마시고
여드름이 났을 때, 니들이 붙은 패치를 붙이고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 조금 덜 아플 수 있고
음식을 할 때 설탕은 좋은 감미료가 되지
월급으로 돈을 모으기는 어려우니 주식 채권 코인 금으로 금융자산에 관심을 갖고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의 조율로 직업을 잘 택해야하고
오가닉 샴푸과 그냥 샴푸를 반반씩 섞어서 쓰면 두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조금 줄기도하고 기름기도 잡을 수 있고
손톱을 자를 때는 양쪽을 산처럼 깎고 모아진 뾰족한 부분을 쳐주고 모서리 부분을 다듬어주면 되고
발톱은 일자로 잘라야 하고
칫솔은 바짝 말려주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식초에 담구었다 말려 소독해주고
운전할 때 자동차는 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고 생각보다 크게 돌아주고
계란깨고 나면 손은 세제로 꼭 씻어주고
직장생활할 때 자기 얘기를 너무 많이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유지가 좋고
오늘을 살면서 순간순간에 느낀 이렇게나 많은 사는 법은 알려주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있다. 살맛 나는 세상에서 사는 법이 아니라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법만 알려주고 있다. 그것 밖에 보이질 않는 내 협곡과 같은 시야가 반백살에 가까운 삶을 살았으면 조금 넓어질 만도 되었건만 여전히, 바늘 구멍만하다. 내 시야는 너무 좁고 생각은 여전히 올드하다. 아이들에게는 '사는 법'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 교과서에 쓰여있지 않은 사는 법을 다 알려주려면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