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그만 좀 해."
"잠깐만! 거의 다 됐어."
"아! 됐다니까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어! 나왔다."
요즘 제법 큰 막둥이의 얼굴은 윤들윤들 기름이 흐른다. 누가 사춘기 아니랄까 봐 아직도 보송보송한 큰 아이와 다르게 티가 많이 난다. 까무잡잡한 피부 군데군데 자리 잡은 피지들은 잘 여물어 가고 있고 키도 나를 많이 따라왔다. 덩치가 커지고 피부는 예민해지고 감정은 오락가락. 가끔 막둥이가 버럭 화를 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터벅터벅 걸어와 내 품에 안기는 녀석을 보면 여전히 아기 같다. 엊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그런 막둥이가 보고 싶어 막둥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벌러덩 누워 두런두런 수다의 꽃을 피울 무렵,
“엄마! 그런데 여기 많이 아파.”
“어디?”
“이것 좀 봐봐.”
“어? 여드름인데?”
막둥이의 맨질맨질한 콧잔등 바로 밑에 제대로 무르익은 탱글탱글한 여드름이 곧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뽀얀 기름덩이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나 이 성난 쪼그마한 적군을 가만두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양손의 엄지손톱으로 바로 가격하여 터쳐주면 하얀 기름덩이가 구멍으로 삐질거리며 나오는 쾌감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북받치는 욕구를 참지 못했다.
“그거 얼른 터트려줘야 해. 안 그럼 더 아플걸?”
“짜지 마!”
“걱정하지 마. 바로 금방 나올 것 같아. 아주 터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막둥이는 욕구에 활활 불이 붙은 나의 눈동자를 보고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붙들려 수술대에 눕혀지고 말았다.
“아! 아프다고?”
“조금만 참아봐. 금방 나온다고.”
손끝만 스쳐도 아픈 지경인 그 피지덩어리 때문에 막둥이는 참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보다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붙잡아 여드름을 짜고 있는 나 자신이 참으로 우스웠다. 뭔가 아이는 수치심을 느낀 표정이었다. 분명, 어두웠고, 싫고 짜증난 다기보다는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내 손은 불안해졌다. 괜히 일을 저질렀나 싶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 여드름을 짜야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을 밀어붙여 마침내 피를 보고야 말았다. 여드름이 구멍으로 분출했고, 피가 조금 나오자 피부의 울룩거림이 가라앉았다.
영 찜찜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눈으로 확인하니 빨간 점 정도로만 남고 싹 가라앉아 수술 경과에 만족스러웠으나 여전히 난 막둥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몇 주째 붙들고 있는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꾸역꾸역 읽었다. 책의 제목은 ‘현명한 부모는 적당한 거리를 둔다’였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는데 도서관만 가면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책만 보면 환장을 하고 2주라는 반납기간 동안 읽지도 못할 분에 넘치는 대여를 하고야 만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몇 번씩 반납과 대여를 반복하였고 이제야 겨우 제대로 읽게 되었는데 읽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의 내 모습 때문에.....
아이에게 아이의 바운더리가 있고 이제 막 생성되기 시작한 그 바운더리가 성숙한 자립형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난 그 따위 쾌감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막둥이도 나도 느끼는 경계를 꾸역꾸역 우격다짐으로 넘고야 말았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아이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그 애씀이 부모의 존재의 이유가 되지 않기 위하고자 아이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과도하게 밀착되어 있는 부모는 아이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분리불안을 경험합니다. 부모가 아이의 삶에서 유리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그러한 부모에 대해 아이는 자신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하고 부모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젠장. 다 알고 있었다.
막둥이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두 살 배기 꼬맹이가 넘어지기도 많이 넘어지건만 놀이터에서 놀 때 혼자서 계단을 기어 올라가고 미끄럼틀을 타고 심지어 그네도 나의 도움 없이 타고자 했다. 불안한 쪽은 늘 나였다. 나는 막둥이의 손을 늘 잡아 주고 싶었지만 늘 내 손을 뿌리쳤다. 그게 서운했다. 도움이 없이도 잘 크는 아이가 서운했다.
막둥이는 변함이 없이 쭈욱 지금까지 그렇게 커오고 있다. 어디 가나 씩씩한 성격 탓에 대장을 먹고, 반장을 하고, 주변에 친구들이 바글바글. 하루 종일 뭐 하고 놀다 오는지 보고도 하지 않지만 얼굴에 땀이 범벅이 돼서 밥 때는 꼭 찾아 들어왔다. 참고로 막둥이는 여자아이다. 공부도 스스로 잘한다. 학습에 대한 욕구를 봐도 끙끙대는 큰 녀석보다는 성적으로는 뒤처질 수 있어도 의지 하나는 죽여준다. 왕왕 노래를 틀어놓고 수학문제를 풀면 몇 십장도 거뜬하다.
적당한 거리가 서운한 쪽은 늘 부모다. 커가는 아이를 곁에 두고 자꾸 기저귀 갈아줄 때와 손잡고 아장아장 걸음마할 때를 그리워한다. 내 역할이 적어진 게 아닐까 불안해하고 그 역할의 축소에 대해 존재의 가치를 견주게 된다. 그러고 나서 아이를 소유하고 싶어 하고 권위 아래 두고 싶어 한다.
틀렸다. 날아가는 새끼 새의 날개를 꺾으려는 부모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캥거루족이라 하지 않냐. 나는 캥거루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가 훨훨 날아 제대로 자립하여 스스로의 삶을 용기 있게 결정하고 자신감 있게 헤쳐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왔다고 나름 믿었는데....
그 여드름 때문에 또 서운한 부모이기를 거부하고 막둥이가 지키고 싶어 하는 거리를 넘어버렸다. 어디 내가 아이를 넘어섬이 그 여드름뿐이었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경계가 부모로부터 자주 무너진 아이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도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지키지 못한다고 했다. 불편한 상황이 되더라도 거절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과도한 책임을 떠안아버리는 그런 사람은 고립을 자처하게 된다.
상상만 해도 싫다. 나도 그런 성향의 아이로 커왔던 터라 정말 싫은데 자꾸 부모라는 권위가 아닌 권력으로 바운더리를 넘고야 만다.
여드름이 준 교훈은 꽤나 따끔했다. 그리고 깊이 파고들었다. 절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의 존재를 권력으로 밀어붙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드름을 볼 때마다 막둥이의 표정이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