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by MAMA

하나,

칫솔 색을 잊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노란색 칫솔이 부엌 정수기 옆에 있었다. 누가 이를 닦고 칫솔을 여기에 두었느냐면서 칫솔을 들고 주인을 찾아 다녔다. 가족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남편과 두 아이뿐인데 주인이 나타나질 않았다.


회사를 다녀왔고, 저녁을 먹었고, 운동을 했고, 땀을 흘렸고, 씻어야 했다. 칫솔이 없었다. 불현듯, 엊저녁 이를 닦다가 거실로 나와 잔소리를 하다가 부엌에서 이를 헹구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욕이 나올 뻔 했다. 정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도 한심한 나를 향한 쌍욕 늘 준비되어 있었다. 칫솔을 들고도 어쩌면 그렇게 내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어쩜 그렇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났을까


업무에 치여, 집안 일에 치여, 아이들의 볼멘 소리에 치여 온 데 간 데 없는 내 자아는 내 소유를 지워 버린 것일까 그까짓 칫솔 하나 때문에 ….


둘,

제육볶음이 찬장에서 발견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 묵상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도 돌린다. 어제 설거지 해 놓은 그릇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찬장 제자리에 넣어두고, 아이들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매일의 루틴이다. 여기에 새벽 운동까지 더해지면 나의 새벽과 아침은 그 누구보다도 빈 틈도 쉴 틈도 없다.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날이었다. 그릇들을 제자리에 넣다가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나왔다.


각종 양념을 넣어둔 찬장 옆, 작은 손잡이 냄비 안에 엊저녁 먹은 제육볶음이 있었다. 유리 뚜껑 안으로 보이는 저 벌건 정체는 설마….

또 불현듯,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 용기가 없어 작은 냄비에 먹다 남은 제육볶음을 넣어두고 더워진 날씨 탓에 상하지 않게 냉장고에 넣어야지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다음이 깜깜했다.


그 냄비에 제육볶음을 담고, 원래 냄비가 있던 자리에 도로 넣어 둔 것이다. 미쳤나하는 한숨이 나왔다. 원망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누굴 원망해야 할 지 몰랐다. 뭐가 생각이 나야 나무랄텐데 딱 거기까지 작은 손잡이 냄비를 탓할 수도 없었다. 벌써 온 것일까? 그 무시무시하다는 그 녀석이?


셋,

남편의 악보공책을 버렸다. 먼지 다듬이의 출몰이다. 하필이면 민감한 큰 아이의 방에서 또 출몰했다. 이사 와서 작년 봄에 다듬이 녀석들을 박멸하기 위해 갖가지 수고를 했다. 매일 락스를 묻혀 닦았고, 강력한 살충제를 사다 뿌리고, 계피향이 나는 천연 살충제를 곳곳에 뿌렸다. 제습제의 양을 늘렸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청소 또 청소. 먼지 다듬이의 먹이인 먼지를 없애 굶겨 죽일 샘이었다.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강력한 햇살에 뜨거워지다 못해 구워질 지경의 날씨가 되자 습기가 말라붙었고, 먼지 다듬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듬이 녀석들이 좋아하는 습기와 먼지가 사라지자 우리의 목적대로 굶어 죽은 것인지 쌀쌀해지는 날씨 덕에 동면에 들어간 것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민감한 큰 아이의 불안이 잠잠해지자 집이 평안해졌다. 아기때부터 조금 더럽게 키울 것을 침 한방울만 흘려도 닦고 또 닦아주면서 키웠더니 저리 유난스러운 걸까 혀를 끌끌 차도 그게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1년. 어째 잠잠하다 했다. 다시 습해진 날씨에 동면에서 깬 것인지. 또 큰 아이의 눈에 띄였다. 이쯤되니 큰 녀석은 먼지 다듬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해충을 박멸하는 살충제를 개발해서 세스코를 밀어내는 회사를 차릴꺼라나 뭐라나

그러던지 말던지 내 일은 또 배로 늘어났다. 괴성이 들렸다. 남편의 책상에 깔려 있던 검정색 마우스 패드에서 먼지를 잡수시고 계시던 단체 손님들을 보자 딸이 기겁을 했다. 일단, 살충제를 뿌리고 락스를 묻혀 닦고 또 닦았다.


그 때, 거슬렸던 남편의 오래된 공책. 악보 공책이었다. 몇 년, 아니 십년은 되어 보이는 공책. 어김없이 불청객의 식사거리였다. 훑어보니 중요한 것이 없었다. 마침, 재활용 버리는 날이라서 갖다가 버리려는 찰나 큰 아이가 아빠가 악보를 그렸던 것 같더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도 버렸다.


난리가 났다. 불청객의 등장에 난리가 난 것이 아니라 남편의 소중한 물건을 허락도 없이 버린 것에 대한 핀잔과 날벼락. 정말 난리가 났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밴드를 다시 한다고 음악을 다시 할 거라고 했다. 합주가 있다고 분명 말했었다. 딸 아이가 아빠가 악보를 그렸다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 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넷,

큰 아이의 체육복 바지가 학기가 다 끝나서야 왔다. 1학년 입학한지 얼마 안되어 큰 아이에게 폭풍 성장기가 찾아왔다. 자고 일어나면 크고 자고 일어나면 커있었다. 분명, 교복을 살 때 한 치수 큰 거 사자고 말했었는데 교복이 크면 간지가 안 난다니 바보 같다니. 한 학기 만에 교복도 체육복도 작아질 줄 예상을 못했다. 동복 체육복 바지가 발목 위로 올라와 버리는데 1년이 체 안 걸렸다. 하복 체육복 반바지가 허벅지위로 한참 올라오는데 1년이 체 안 걸렸다.


큰 아이는 교복은 괜찮고 체육복 바지를 하나 더 사달라고 했다. 분명, 몇 번이고 말을 했다. 그런데 일을 가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발주량을 감당하려면 종일 신경이 곤두섰다. 이름 모를 듣도 보도 못한 반도체 장비 부품들도 익숙해져서 순식간에 납품 준비를 하고 수천개의 품목들도 척하면 척 발주하고 재고 관리에 출고관리까지 …. 그러다보니 큰 아이 체육복 바지는 계속 작아졌다.


결국, 늦게 주문한 체육복 바지는 겨울 방학 때 받을 수 있었다. 하복 바지는 입을 만해서 2학년 1학기까지 버텼는데 1학기 내내 그걸 보고 있으면서도 하복바지를 주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되어서야 나는 주문했다.


望 却

잊어버릴

물리칠


무얼 잊어버리고

무얼 물리치고 있는 것일까


제발 나는 잊어버리지 말자

나를 물리치지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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