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욱 늘어나는 하얗고 뽀얀 치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입가에 묻은 시큼하니 짭조름한 토마토소스를 핥아 간을 맞추니 담백하니 맛이 좋았다. 피자치즈를 사는 게 돈 아까운 짓이라 여겼다. 드넓은 피자 도우에 형형색색의 채소들과 빨간 페페로니에 고기 토핑은 있어줘야 돈 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요새 우리 사춘기 소녀들은 피자치즈만 먹는다. 초원뿐인 엄마 밥을 벗어나려는 반항은 줄기차다. 동생네 가는 길, 육아에 지쳐 점심도 못 먹은 녀석들을 위해 피자 두 판을 샀다. 한 판은 치즈피자요, 다른 한 판은 나의 의지로 시킨 콤비네이션.
"형님! 우리 얘가 에어컨을 끄면 자꾸 잠을 못 자요."
"누나! 뽀로로가 없으면 밥을 못 먹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랜만에 만난 동생네 부부가 피자를 우적우적 먹으면서 두 살배기 딸을 키우면서 늘어 난 걱정과 고민에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겨울이 오는 게 걱정스러웠다. 빠듯한 형편에 마땅한 브랜드 패딩 한 벌도 사 입히기가 어려웠다. 남들 집에 돈이 나오는 화수분이 있나 싶었다. 어린이 집 꼬맹이부터 유치원 생들도 꽤나 비싼 패딩들을 입었다. 상대적 빈곤감과 싸워야 하는 혹독한 겨울은 더 춥게 느껴졌다. 할인 매장에 가서 이름 없는 또는 유행 지난 패딩을 사서 입혔다. 내가 보기엔 브랜드 로고가 찍힌 것들과 만만찮게 튼튼하고 좋아 보였다. 옷들도 도톰하니 질기게 잘 만들어졌다. 몇 해를 입혀도 찢어지지도 않았고, 눈 밭에서 굴러다니느라 더러워진 옷들은 세탁기에 잘 세탁해서 잘 말린 다음 옷걸이로 두드려 입혔다.
겨울이 오면 제일 먼저 내복부터 샀다. 기모가 들어간 내복 몇 장이면 잠옷으로도 입히고 방한용으로 옷 안에도 입혀 겨울을 났다. 난방비를 아껴보겠다고 한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다. 몇 만 원은 절약할 수 있었다. 참! 수면 양말도 필수였다. 아이들은 겨울날, 남들보다 비싼 패딩은 없어도 찬바람 막아 줄 내복을 입고 영하 10 도의 매서운 날씨에도 밖에서 몇 시간은 거뜬히 놀았다. 코가 빨개지고 손이 시려도 연을 날리고, 축구를 했고, 술래잡기를 하고, 산에 오르고, 눈 밭에서 눈싸움을 하고 구르면서 추위를 즐겼다.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에어컨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냉매제로 인한 찬바람을 맞으며 땀이 안 나는 한 여름밤을 맞이한 지 일 년 밖에 되질 않았다. 여름도 만만찮게 두려운 상대였다. 설거지를 맨 손으로 하기 시작할 때 즈음이면 찬물에도 찬기가 없다. 여름 내내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현관에 모기장을 치고, 밤새 문을 열어 놓으면 남편은 현관 앞 좁은 복도에서 도둑이 들어올까 봐 프라이팬을 들고 잠이 들었다. 아이들은 아이스팩에 수건을 둘러 겨드랑이며 가슴팍에 안고 잠이 들었다. 만화 같은 이야기라도 우리는 최근까지 그렇게 살았다.
여름에 매미들이 떼창을 하기 시작하면 나는 아이들과 바빠졌다. 여름에 놀 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잠자리도 잡고 매미도 잡아야 했다. 특히, 나무마다 매미들이 벗은 허물을 주어 모으면 페트병으로 하나 가득이었다. 학교 운동장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학원을 가지 않았던 우리 아이들의 차지였다. 여름 운동장은 우리들의 물놀이터였다. 신나게 술래 잡기를 하고 논 후, 수돗가에서 신나게 물을 뒤집어썼다. 온몸이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집에 와서 씻고 난 후,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면 한 여름날 벌게진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컸다. 정말 배고프게 없이 살던 50년대 60년대가 아니었기에 내가 겪은 어려움을 가난이라 표현하기에는 부끄럽고 미안하다. 적당한 단어를 찾기 어렵지만 가장 가까운 단어를 고르자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의 인내심이 생성되기도 전에 아이들 앞에 아이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선택지를 갖다 놓고야 마는 주변의 풍요로운 부모들 탓에 우리 아이들이 느꼈을 상대적 모자람은 내게는 늘 미안함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언제나 내 아이들이 그들이 입고 두르고 갖고 있던 물질보다 더 값어치 있고 행복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건 나의 시간이었다.
난 내가 먹고 싶은 걸 만들여 먹였다. 끼니때마다 나물 반찬이 있었다. 번거롭지만 냉동식품도 라면도 웬만하면 사질 않았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놀았다. 체면 차리는 어른이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뛰었다. 아이들보다 빨리 더 많이. 나무도 탔다. 매미도 잡았다. 산 꼭대기까지 뛰었다. 축구도 했고, 배드민턴도 쳤다. 자전거도 탔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사계절이 행복했다. 추위도 더위도 아이들은 잘 견뎠고, 봄이나 가을이 옴에 민감하였다. 노을을 보면서 아름답다 여겼고, 단풍과 벚꽃을 보면서 사색에 잠길 줄 알았다. 흙이 묻어도 괜찮았고, 땀이 나도 괜찮았다. 더워도 추워도 떼를 쓰지 않았다. 걷고 뛰어도 힘들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양한 변화를 온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여름이 그리고 겨울이 열 네덧번 정도 지났을 뿐인데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앞으로 살아갈 일들에 대해 꿈을 꾸어보기도 하고 고민을 해보기도 하면서 자라나고 있다. 그때 그 시절 나는 또 견뎌야만 하는 겨울과 여름을 준비했던 최소한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는데 돌아보니 아이들은 최고의 시간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유퀴즈에 출연한 나태주 시인의 딸, 서울대 나민애 교수가 출연했다. 나민애 교수와 나태주 시인이 나눈 대화는 따뜻함과 뭉클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나는 최소한의 아버지였다 미안하고 고마웠다'라고 나태주 시인이 쓰자, 나민애 교수는 가난은 '우리의 것'이었으며 가난을 아버지가 막아주었다 답하고 있다. 나야말로 최소한의 어미였다. 늘 세일 스티커가 붙어 있는 할인 코너에서 아이들 먹거리를 샀고, 과일 가게의 모퉁이 것들을 샀다. 이런 내게 과분하게도 아이들은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우리에게 모자람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부족했기에 무엇이든 잘 견딜 줄 알았고, 인내했고 감사했다.
난 부자가 아니다. 부모가 뭐든 줄 수 있는 산타클로스였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난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내게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걸 주었다. 모자란 부모를 일찍 깨닫게 해 주어 미안했었고, 자책도 했었지만, 내 아이들도 항상 아이로 머무는 건 아니니까. 언젠가 많은 어려움을 견뎌야 할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부족함 속에 인내를 배우고 의지를 배운 건 신께서 주신 선물이었음에 이제와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