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회 그리고 나의 목사님
내가 일곱 살 즈음, 서울 중심에서 살다가 경기도의 한 신도시로 이사를 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었고,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놀러 가는 곳도 도심이 아니라 짭조름한 냄새가 나는 포구였다. 촌으로 이사를 온 거구나라고 매일 느꼈던 건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내가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적막함에 모래 바람만 불어 댔었다. 당시 14층이었던 집에서 내려다보면 주차장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자 아파트 단지가 꽉 차기 시작했다. 입학했던 학교 내 학생수가 너무 많아져 관내 다른 초등학교를 짓기로 했고, 나는 3학년 때 새로 지은 학교로 옮겨 갔다. 지금 내 아이들의 초등학교 한 반의 학생수는 스물다섯 인데도 아이들은 숨을 못 쉴 정도로 많다고 투덜대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번호는 71번이었으니, 학생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말을 더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때였다. 내가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가게 된 때. 미국에서 거주했던 십여 년을 제외하고 한 교회를 이십 팔 년째 섬기고 있다. 동네에 있던 교회를 다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엄마를 전도하신 구역장님을 따라 버스를 타고 타 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은 교회였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는 그 후로 가까운 도시 주변으로 성전을 지었고, 신도시였던 우리 도시에도 제법 큰 규모의 성전이 지어졌다. 담임 목사님께서는 주일마다 각 성전을 다니시면서 설교를 하셨고, 폭발적으로 성도수가 늘었다. 하나의 성전이었던 작은 교회는 지금 수 십 개로 늘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벽송을 하고, 구역예배 때마다 수십 명이 집에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던 그때의 교회 성장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 중심에 오직 주님만 계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타교회처럼 각종 장비와 악기로 찬양을 하지 않는다. 각종 CCM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여지껏 오직 찬송가와 피아노만 대예배에 쓰인다. 목사님의 말씀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 같이 ‘오직 예수’뿐이다. 말씀 중에는 사담이나 세상 이야기가 거의 없다. 목사님께서는 철저하게 말씀을 말씀으로만 푸시고 비유나 개인의 생각도 철저히 배제하신다. 어떤 이들은 우리 교회에 오면 찬송도 지루하고 말씀도 지루하다 혀를 내두르고 떠나지만 성도들은 목사님을 닮아 그 방침이 좋아서 교회에 남는다. 그 점이 바로 정통 보수파 복음주의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교회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예수’ 외에는 교회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액세서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고 하나뿐이었던 교회는 폭발적 성장기를 거쳐 조직화 분업화 되었고, 각 성전마다 교구 목사님과 담당 전도사님들, 장로님들로 구성된 조직이 철저한 행정분담을 하여 거대한 하나의 몸집처럼 돌아간다. 성도들은 각자의 맡은 분야에서 헌신 봉사하고, 교회의 그 어떠한 작은 부서도 불합리함과 타협함이 없이 1원의 불의도 없는 청렴한 운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아직도 모든 분야 부서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다. 엄마께서 얼마 전, 30년 근속 상을 받으셨는데 직분을 받으시고 단, 한 주도 거르시지 않고 직접 제출하시는 구역예배 보고서로 그 횟수가 기록되어 30년이 된 것이었다. 엄마 연세가 일흔셋이고 40년 근속 상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은 여든이 넘으신 담임 목사님보다도 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들이었다. 실로 그 성실함에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들을 보관하고 기록하고 있는 교회의 운영에 감탄했다. 작았던 교회가 초대형 교회가 되었음에 좋은 점도 있고 안타깝거나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건 교회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다는 더이상 그런 따뜻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 대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일뿐이다.
목사님의 연세는 작년에 팔순을 지내신 아버지보다도 세 살이 많으시다. 아직도 건재하시고 일주일에 세 번 설교를 하신다. 수많은 성도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내신 목사님은 이제 주름이 깊게 패이고 허리가 구부러진 흰머리의 성도님들을 애정 그 이상을 담아 사랑하신다. 외롭고 힘들고 홀로 많은 것들을 감내하셔야 했겠지만 전혀 그런 감정을 입밖으로 꺼내시거나 얼굴에 드러내신 일이 단, 한번도 없으셨던 담임 목사님께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물론,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지만 그 둘째는 목사님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내가 연재하는 WAKE UP이라는 글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 첫째, 이 글을 읽는 잠자는 그리스도인을 깨우기 위함이 그 둘째였다. 그러나 글을 쓰기 전 고민하고 말씀을 읽고 성령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그 과정의 연속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깨달아 교회의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시면서 설교 준비를 하시는지 알게 되었지만 이 앎은 내가 감히 짐작해보건데의 그 짐작일 뿐이다. 사역자님들이 성도들 앞 단상 위에 서실 땐 그 모든 순간 준비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즐거움과 감사함과 열정이 폭발하는 날도 있지만, 심적으로 심히 힘들거나 무미건조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압박감이 있는 날도 있을 것이라 추측해 보지만 정말 대단한 건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은 모습으로 성도들 앞에 서신다는 것. 결단과 믿음으로 다져진 진정한 프로정신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나 같은 수준의 신앙으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수십년이다. 성실하게 한 주도 빠짐없이 ‘오직 에수’를 전하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40년 전과 같은 그 모습으로 흐트러짐 없이 주일인 오늘도 목사님은 말씀을 전하셨다. 언제나 정갈하게 하얀 와이셔츠에 정장을 차려입으셨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설교 중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시는 빈틈없이 준비된 모습. 여든셋의 연세에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씩 많게는 네 번씩 성도들을 만나신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의 설교 중에 졸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수첩에 적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겠지만 목사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늘 기도하셨고, 준비하셨고, 또 전하시고 또 준비하신다.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목사님께서 언제까지 우리 성도들의 앞에 서실지 아무도 모르지만, 목사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셔도 내 어릴 적 기억 하나의 작은 교회에 시작된 교회가 수 만의 성도들을 갖게 되기까지의 성장이 변하지 않는 오랜 성실한 믿음의 반석으로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속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목사님의 건강과 이 시간도 편히 쉬지 못하시고 말씀 준비를 하실 성실한 주의 종의 수고를 값없이 받는 우리가 목사님의 기도처럼 든든히 믿음으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