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추수감사절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이제 달력이 두 장 만 남았다고 아쉬움이 섞인 푸념을 할 때가 몇 주 전이었는데 그 몇 주마저 또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자연의 색들은 거리마다 산마다 수를 놓았다. 어느 대학 회화과에 차석으로 합격한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큰 조카의 그림과 캐나다에서 삼십년을 사시다가 은퇴 후 한국에 터를 잡고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운 이모의 전람회 전시 그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생동감과 색감은 광활한 땅을 뒤덮었다. 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작품 위로 조물주의 땀 흘리는 농부를 위한 선물인 바람이 불어오니 이제 떨어질 채비를 마친 마른 단풍잎들의 부벼댐은 협주곡이 되어 인간에게 음악까지 선사했다. 매년 찾아오는 가을이지만 창조주의 작품은 늘 새롭고 뛰어나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황홀한 창조주의 빚어내심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감탄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올 해 팥 수확량은 지난 해에 비해 많이 줄었다. 가을에 비가 많이 온 터라 마지막 뒷심을 바라며 알알이 속을 채우는 팥깍지들의 노력은 차가운 빗방울에 허사가 되어 뭉개져버린 녀석들이 많았다. 이모작 밭 농사로 거두어 들인 곡식으로 겨울 날 준비와 봄 파종 비용까지 준비하는 전업 농사꾼들의 한 숨도 공감이 되는 뭘 조금 아는 '사람 농사꾼'이 되었다. 2주 전 서리가 내린다고 밭에서는 막바지 수확이 한창이었고, 나와 남편은 장대만치 자란 땅두릎과 목단의 겨울나기를 위해 싹뚝 베어주었고 지난해 뭘 몰라 꼭꼭 눌러 심었던 마늘 파종에 다시 도전하고자 땅을 갈아 비닐을 덮어두었다.
우리의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함에 분주하다. 교회에서는 다음주 앞으로 다가 온 추수감사절을 위해 오곡백과 색으로 단장을 하였고, 교회 식당 주방 앞에는 잘 길러서 따 놓은 누런 호박들이 쌓여 있었다. 김장철 재료로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파는 행사가 있었고, 가는 가을이 아쉽고 오는 겨울을 건강히 준비하기 위한 체육대회가 있었다. 높아져 구름 한 점 없는 그런 좋은 날, 성도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오는 순서대로 모여 분홍색, 녹색, 하늘색, 노란색 스티커 중 본인이 원하는 색상의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골라 팀을 정했다. 일찌감치 모여 있던 외국인 선교 봉사 연합회와 스무명 정도의 외국인 근로자 성도들은 노란색을 골라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고, 아이들은 제 마음껏 취향대로 하늘색과 분홍색을 골랐다. 성도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담당하시는 권사님들은 주방 일을 마무리하고 제일 늦게 합류하셨는데 녹색을 고르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원이 자로 재지는 않았지만 스무명 남짓 얼추 비슷비슷한 인원으로 구성이 되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무무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 빗 속에서 했던 줄다리기, 100M 달리기, 씨름, 밀가루 옮기기, 큰 공 배구에 기를 쓰고 임하는 출연자들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 지 모른다. 처음엔 그게 뭐 별거라고 하며 우스게로 시작했지만 막상 종목이 시작되면 죽자사자 이기고자 했다. 그렇지, 그게 인간이었다. 별 수 없이 탐욕을 갖고 태어난 죄인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함께하자 서로 사랑하며’라는 슬로건을 내 건 체육대회라고는 하지만 그들처럼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
첫 종목은 몸풀기 OX 퀴즈였다. 82년 설립된 교회의 연혁과 역사에 관한 문제부터 성도생활에 관한 성경 지식까지 갈팡질팡의 연속이었지만 두 딸과 나는 끝까지 살아 남았다. 그 문제들 중에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성도 생활의 목적은 전도에 힘쓰고 성도로서의 교양과 품위를 갖는 것이다.’
”O일까 X일까? 이동해 주십시오“
아무리 듣고 보아도 X일리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사회자는 우리 교회 게시판에 개제되어 있는 문장이라고 분명히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틀린 곳이 없다고 O로 향해야 하는 발걸음에 남편은 대뜸 이렇게 말을 했다.
"성도 생활의 목적은 구원받는 거 아니야? X로 가야지."
"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에잇. X로 가야해."
남편의 말에 놀라웠다. 그동안 내가 남편보다 더 믿음이 낫다고 자부했던 터였다. 나와 같은 겸손하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판단을 서슴치 않게 일삼는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생각보다 많다. 교회 시간에 어느 장로님께서 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기도하시지만 우리는 늘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만다. 누구하나 예외가 없다. 나는 남편 말에 놀라서 X로 따라갔고, 정답은 X였음에 두 번 놀랐다. 물론, X인 이유는 교회에 걸려 있는 문장이 '교양과 품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교양과 품위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정답을 맞춘 후로 난 살아 남았다.
줄다리기를 했다. 아이들이 골라 잡은 하늘색 덕에 가족 단위가 많았던 하늘색팀과 분홍색팀이 붙었다. 시작부터 줄은 팽팽했다. 교회에서 하는 체육대회라고 천사처럼 착한 마음으로 져도 된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줄을 단단히 붙잡고 죽기 살기로 당겼다. 기합인지 비명인지 괴성들이 들렸으나 한쪽에서는 환호로 다른 한쪽에서는 한숨으로 경기가 끝이 났고, 우리는 녹색팀과 노란색팀의 승자와 결승을 치르려고 기다렸다. 녹색팀은 앞서 말했듯이 주방에서 뒤늦게 합류한 권사님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노란색팀은 대부분이 외국인 근로자들이었다. 게임이 되질 않았다. 과반 이상이 성인 남자들로 구성된 팀을 할머니들이 이길 수 없었다.
빤히 노란색 팀이 우세한 것을 보고도 우리 팀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요즘 MZ 세대들은 이러한 경우 '근자감'이라고들 하지 않나. 어쩜 그렇게도 딱 맞춤 줄임말인지 근자감이 넘쳤던 우리 하늘색 팀은 결국 허공의 먼지처럼 줄 밖으로 날아가거나 끌려갔다. 시작부터 몸이 앞으로 쭈욱 당겨져 휴지조각인 된 듯 노란색 팀이 힘쓰는 박자에 맞춰 펄럭거리면서 휘청휘청거렸다. 아직도 이길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죽어라 줄을 붙잡고 버티다가 질질 끌려가는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달리기를 했다. 이어 달리기를 하면 한 번 나가봐야지 마음을 먹었다. 잘난 체의 연발이었다. 나이 드신 교회의 뭇 성도님들을 거뜬히 이길 수 있으리라 발 빠른 모습으로 각인을 시켜드리고 '대단히 잘 달리네'라는 칭찬과 부러움의 인사를 받으리라는 허상이 중얼중얼 머릿속에 가득찼다. 아뿔사! 훌라후프 돌리면서 달리기, 2인 3각 달리기, 큰 공 굴리면서 달리기 ( 이 종목은 유아부 참여가 필수였다.), 낙하산 허리에 차고 달리기, 성경책 바통 쥐고 달리기 였다. 빠른 발은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꼬맹이 신사 숙녀부터 일흔의 장로님들, 권사님들까지 모든 연령대의 참여로 선수가 구성되었다. 난 참여하지 않았다. 참여할 수 있는 분야가 없었다. 훌라후프 돌리면서 달리기에는 꽤 날씬하고 날렵한 청년이, 2인 3각 달리기에는 우리 막둥이와 친구가, 큰 공 굴리기에는 세 살난 숙녀분이, 그리고 낙하산 허리에 차고 달리기에는 힘 좋아 뵈는 여성 집사님이, 마지막 주자 성경 책 바통 갖고 달리기는 장로님이 선수로 자진했다. 덕분에 신나게 목청을 높여 응원했다. 체육대회의 꽃인 이어달리기의 우승팀은 권사님들로 구성되었던 녹색팀이었다. 당연히 열세일거라 편견을 과감히 깨고 제일 점수가 컸던 이어 달리기 우승을 거머쥐면서 전체 우승팀이 되었다.
이어서 경품 추첨시간. 뭐니뭐니해도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내게는 줄다리기 우승의 쾌감도 달리기에서 바통을 쥐고 빨리 달림을 뽐낼 수 있는 기회도 다 날아가 버렸지만, 경품 추첨 시간에 내 번호가 불리는 기쁨과 가히 둘을 비교할 수 없었다. 내 번호가 불리는 순간 로또로 돈벼락이라도 맞은 듯 꺄악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어 나갔다. 누가 보면 전국 노래 자랑 1등이라도 되거나 경품으로 고급 승용차라도 받은 것 같은 격한 반응이었겠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게 고작 고무장갑일지라도 나는 춤을 추었다.
얼마 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 명작은 별 거 아닌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끝까지 안달내게 하는 힘이 있다. 영국에서 소수의 귀족계층이 부를 거머쥐고 지배했던 계급사회에서 산업혁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쓰여진 이 명작은 다아시의 오만함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으로 잘못된 감정들이 뒤얽혀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다가 극적으로 화해하고 화합하며 엔딩을 맞는다. 체육대회 날, 나는 다아시의 오만함으로 사랑하는 남편의 믿음을 판단하고, 약체임에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섣불리 믿었고, 또 다시 내 자신을 연거푸 드러내며 남들 앞에 자랑코자 했지만 기회조차 주어지질 않았다. 당연히 질 거라 예상했던 주방 짬밥 몇 백년 권사님들의 우승으로 내가 가진 나이에 대한 편견은 하찮아졌다. 그리고 더 하찮아 보이는 고무장갑을 받아 들고는 가슴이 동에서 서로 두근두근 달리기를 했다.
가끔은 어처구니 없는 일로 인해 중요한 것들이 새삼 깨달아 질 때가 있다. 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처럼 오만했던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나와 화해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