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걸렸다.
뇌가 정지한 듯 며칠 무얼 먹어도 아무 맛이 나질 않았다. 덕분에 냄새에 무뎌져 그 어떤 냄새도 향기로웠다. 코를 킁킁 거리면서 콧물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 오다가 헐어버린 목을 훑어 까슬거리는 느낌에 켁켁거리기를 일주일. 회사 퇴근 시간만 되면 저녁 식사 시간 앞치마를 춤을 추며 두르던 식욕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바닥나버린 체력 탓에 배고픔도 허기짐도 둔해졌다.
"감기는 좀 어때? 괜찮아?"
"네에! 걱정마요.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원래 출근하면서 엄마와 매일 통화를 하지만 감기가 걸린 후로는 통화하는 내내 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침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운동은 꿈도 꾸질 못했다. 연초부터 쏟아지는 업무량을 소화하느라 집에 오면 기진맥진이었다. 다시, 또 다시, 눈을 뜨면 출근해서 경주마처럼 일을 한 지 두 달 째. 업무와 상관없이 강체력으로 거듭났다 생각하여 빠짐없이 일주일에 서너번은 운동을 했는데 환절기 감기에 몸이 고꾸라졌다.
감기가 걸린 목소리를 들은 엄마는
"콩나물 국 끓여 먹어 꼭!"
"오늘은 어때?"
"어느 유치원 교사가 독감으로 죽었다고 하더라. 고열이 났는데도 무리를 했나봐."
"엄마가 반찬이라도 해서 갈까?"
"얘들은 어떠니?"
매일 걱정어린 이 많은 질문들에 내 대답은 냉랭한 "괜찮아"뿐이었다. 앓는 소리 한 번 하질 않았다.
매일 엄마는 걱정을 했다. 난 엄마의 걱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의지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불안하고 걱정투성이였다. 뭐든 고민을 말할 수 있거나 위로의 말을 건내어 들을 수 있는 기댈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도 그런 여린 엄마에게 무언가 기대고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 수록 속으로 감내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삼키는 말들도 많아졌다. 친정엄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집 문턱이 닳도록 오가는 모녀지간도 있다지만 난 점점 엄마와 멀어지기만 했다. 내 걱정이 깊을수록 내 고민이 많을수록 내 사정이 복잡할수록 난 엄마뿐아니라 가족과 점점 멀어졌다. 뜻밖의 전화 정도로는 속내를 나눌 수 없다. 그저 안부 전화정도만으로 관계의 거리는 멀지 않을만큼의 발치에서 유지될 뿐이었다.
"나 도서관 다녀올게."
웬일로 입맛이 조금 돌아와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고는 남편에게 설거지를 맡겼다. 책 반납 일인데 다 읽지 못한 책을 반납하려고 억지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촉촉히 젖은 밤공기는 봄이라기 보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 같았다. 어둑한 거리에 삼삼오오 산책을 나온 부부, 가족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봄 꽃이 피었다고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지만 아직 우리 동네는 꽃이 피질 않았다. 미세먼지까지 내려 앉은 터라 밤 공기가 만족스러운 산책 길이라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혼자 터벅거리며 맞이하는 봄 밤에 대한 반가움때문에 설렘이 있었다. 덕분에 숨쉴 때마다 몸 상태가 꽤 그럴듯할 정도로 호전되어 걸음이 조금씩 가벼움을 느꼈다.
"언니! 잘 지내?"
몇 달만에 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뜨문뜨문. 언니도 아이들 챙기느라 바빠 서로 사정을 이해한다고해도 몇 달만에 전화라니 .... 어색한 대화 몇 마디 오고가니 더 할 말이 없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친 언니라해도 속사정을 서로 얘기하지 않다보니 결혼 후,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이제는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고 가끔 안부만 묻는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나와 다시금 왔던 길을 걷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가는 길뿐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길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떠들고 나누고 듣고 주고 받아야 할 누군가가 없다. 마음에 무거운 짐들을 나는 나누어지길 싫어했다. 혼자 지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날 영웅으로 만들었던 때는 이제 지났다. 그 시간은 결국, 날 고독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유독 더욱 커져만갔다.
뭐든 혼자 씹어 삼키는 성격은 홀로서기가 아닌 혼자서기가 되어버렸나보다. 아프면 아프다고 쓰면 쓰다고 나도 말할 것을.......
이제 감기가 거의 다 나아가는 모양이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찐득찐득한 콧물을 몇 차례 킁킁대면서 푸니 시원하다.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는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볼 작정이다. 서툴지만 영웅이 아니라 가족이 되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