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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는 것들

by MAMA

하나, 알곡과 쭉정이


요즘 주말에는 남편과 마주 앉아 팥에 있는 돌을 고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작년 6월, 시어머님이 파종하셨던 팥을 늦가을에 남편과 거두었다. 거둔 팥을 대여섯 뿌리씩 묶어 밭의 창고에 묶어 놓은 전선에 널어 2주간 말렸다. 밭일이 서툴기도하고 밭이 집에서 멀다보니까 한 번 갈때 많은 일을 해놓고 와야 한다는 욕심이 늘 있다. 그러나 욕심만큼 일에 진척은 없다. 지난 3년 밭에서 했던 일이라고는 무성한 잡초 베기가 전부였다. 집 식구들 먹는 거라고 어머님께서 농약을 치시지 않다보니 갈 때마다 하는 일이라고는 밭작물을 뒤덮은 잡초를 베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잡초를 한 삼년 가까이 베다보니 잡초를 이길만한 숙련된 낫질이 되어 이제는 제법 뭔가 농사라 부를 수 있는 파종이란 것도 추수란 것도 할 짬이 조금씩 생겼다. 하다보면 늘 제자리 인것 같던 밭농사였는데 작년에는 4년차된 땅두릅을 수확해 여러 번 먹었고, 매실도 따서 매실액도 담구었고, 옆집 밭의 어르신이 주신 호박 모종을 심어 둥글둥글 호박도 따다 먹었다. 결과중심주의인 세상을 욕할 것이 없는 게 죽어라 잡초에 낫질만 할 때는 투덜거리며 지루했던 농사가 수확물이 있으니 힘들어도 보람이란게 느껴졌다.


말린 팥의 양이 어마어마 했다. 그래도 두어번 오면 팥을 다 털어 갖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농사는 생각과는 그 일의 속도가 다르다. 널어 말린 팥의 깍지를 다 떼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도리깨질을 해서 떼어냈으면 나을뻔 했겠지만 초보 농사꾼 심정에 낱 알 한 알이라도 날아가는 게 싫어서 일일이 깍지를 떼었고, 그 깍지를 양파망에 넣어 비벼대거나 발로 밟아 팥 알을 분리시켰다. 15 킬로그램 정도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김치담그는 대형 고무 대야로 가득 나오는 양이었다. 남들은 11월 초 벌써 밭을 정리하고 콩이든 팥이든 깨든 돌을 골라내는 석발기에 넣어 수확물을 챙겨 갔지만, 11월 말이 되어도 끝나지 않던 팥 수확은 12월 둘째주가 되어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팥을 챙기기도 바쁜 와중에 욕심많은 우리는 양파와 마늘 모종도 심었다. 정성스럽게 미니 비닐 하우스도 만들어 겨우내 양파와 마늘이 찬 바람을 잘 견디기를 바랐다.


여하튼 그 놈의 팥. 그렇게 겨우 수확한 팥에는 돌이며 검불대기며 깍지 찌끼까지 가득했다. 그 많은 양의 팥에 돌을 골라 낼 생각을 하니 아득하여 일단 대야에 가득한 팥을 차에 싣고는 가까운 정미소로 향했다. 정미소에 가니 어르신들이 뭐 그 정도의 양 갖고 기계를 쓰냐면서 비웃으시며 바람부는 날 키질로 까불리라고 하셨다. 낑낑대면서 그 대야를 또 차에 싣고 있으니, 정미소에 계셨던 어르신들 중 한 명이 따라 나오셔서 당신의 집이 여기서 가까운데 직접 키질을 해주시겠다고 같이 가자고 하셨다. 옷이며 머리며 엉망진창인 꼴에 팥을 들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련한 도시 촌놈들을 보니 안쓰러우셨던 모양이다. 칠 순이 넘은 어르신의 키질 몇번에 돌의 양이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수확한 팥을 집으로 가져오게 되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과 마주 앉아 팥의 돌을 고르면서 겨울 주말을 보내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치매방지에 좋다고 부지런히 손놀림을 한 덕분에 반 정도는 돌을 골라내어 파종을 하셨던 어머님께 드렸다. 이제 반 정도 남았는데 수확 후 몇 주가 지나니 돌을 골라 낼 때 알곡과 쭉정이가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쭉정이는 속이 비어 그런지 매말라 형체가 찌그러지기도 했고, 하얗게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둥근 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비틀어지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했다. 알곡은 여전히 단단했고, 베란다에서 찬바람을 맞건 물에 넣건 제 모양 그대로 묵직하며 또랑또랑했다.


"사람만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게 아니네."


둘, 면류관


12월 19일. 큰 딸의 첫 번째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원래 모든 일에 긴장감이 높은 아이인 아이가 시험을 앞두고 한 달을 넘게 밤잠을 설쳤다.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아야만 마음이 편해져 졸아도 새벽 한 두시까지 책상에 불을 밝힌 아이를 보자니 안쓰럽기도 했지만 학원 한 번 다닌 적 없이 유튜브의 선생들의 도움을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시험준비를 하는 딸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험 날이 되었다. 덩달아 긴장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야 늘 공부를 못해도 살 길은 많다고 엄마가 다 먹여 살릴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지만 애초에 부족하게 살다보니 세상 물정에 눈이 일찍 뜨인 딸에게 앞길이 보장되지 않는 그런 헛한 약속 따위는 먹히질 않았다. 시험 시간이 끝났고 딸에게 카톡이 왔다. 두 과목을 보았는데 영어는 백점이고 과학은 한 문제를 틀렸다고 했다. 그런데 긴장하고 있던 몸이 드디어 바닥난 체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콧물을 줄줄 흘리는 딸을 데리고 내과를 찾았고, 나도 오랜 감기로 골골댔지만 돈 생각에 비타민을 듬뿍 넣어 딸에게만 수액을 맞추어 주었다.


다음 날, 국어와 수학 시험이 있었다. 두 과목 모두 만점을 맞았다. 전화가 왔다. 1등을 했다고.....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1등 소식을 전하는 딸의 전화를 받으니 뒷바라지 해주려면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힘이 불끈 솟았다. 무엇이든 부족하게 자랐지만 물질로 해주는 넘침은 못해주어도 어미로서의 노력과 내 밥상에는 부족함이 없게 해주고파서 어떻게든 잘 먹였고 잘 놀아주었고 지금은 때가 되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그 노력이 아이의 성적과 다 관계하라는 법은 없고 이번의 첫 시험으로 뭔가가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확실한 건 아이의 노력과 성과가 내 자부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사실이었다.


성경의 잠언 17장 6절에 "자식은 노인의 면류관이요 부모는 자식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노인의 머리에 쓴 왕관은 곧 자식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노인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라는 말이고, 부모 또한 자식의 자부심과 자랑이라는 뜻이다. 내가 부모된 입장으로 내 자식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과 자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나도 부끄러운 인간이요 어리석고 모자람이 많은 터라 매일의 반성 속에 육아를 하고 있고 사춘기 자녀들과 반목하는 일들이 많아 아직 내가 내 딸들의 어떤 영광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부모님은 내가 영광을 돌릴만큼의 존경을 하고 있다고 말할 확신이 없다. 후반 구절은 내 딸들이 장성했을 때, 또는 내가 이 땅을 떠날 때 증명이 되어질 것 같고, 전반 구절에 대해서 내 지난 육아의 시간을 보니 어느 정도 증명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풍족하게 자란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때가 있었다. 풍족하게 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을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확신했던 것은 부족하게 자라도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늘 애쓰고 고민했던 나의 기도와 시간은 헛되지 않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직은 다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어 시간을 두고 매일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야 한다는 확신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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