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1월 탄생둥이들은 항상 피곤하다. 사회에 나와 어디를 가도 정확한 생년월일을 밝혀야 했지만, 이 나이에 나이를 따져 무엇할까 싶어 난 별로 까탈스럽지 않게 굴었었다. 80년생 남편과도 평생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당연히 80년생은 동갑친구나 다름없고, 81년생은 구태여 본인이 언니 누나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했고, 요즘은 누가 빠른 생일을 따지냐 하면 그냥 친구 하자 했지만, 아무래도 학교를 같이 다니지 않은 경우엔 동생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꼰대기질인가. 그래도 명확히 할 것은 처음부터 밝히는 게 서로 호칭을 정하기에 편리했다.
입사 초, 회식 때 고양이 엄마 박차장은 나와 친구 먹자 해서 그러자고 했으나 14년 차 차장님이 술김에 한 소리를 진심 삼아 '야자' 할 수 없어 여태껏 존대를 한다. 물론, 그건 동갑내기 사장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같다고 사회에서 다 같을 순 없다. 서로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 공감할 뿐이지 엄연히 건널 수 없는 계급이라는 강이 존재한다. 이 계급이 나에게는 십수 년의 육아로 다져진 주부의 세월이고 그들에게는 사회의 모진 찬바람 속에 회사를 키우고 굳건하게 세운 세월이다. 비교 불가한 다른 군의 경력이기 때문에 존중하지만 만약, 같은 군에 속하게 된 경우라면 경력자의 계급장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그들이 갑임을 인정하고 조직의 질서를 준수한다. 그게 서로 편하다. 술 김의 힘을 빌어 정이란 것에 얽혀 선을 넘는 일은 삼가해야 마땅함을 잘 안다. 그렇게 나는 동갑내기 둘을 변함없는 태도로 상사로 모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 심적으로 만만한 상대가 동갑내기임은 사실이다. 가끔 오고 가는 생활의 대화 속에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시대를 산 공감형성으로 인한 편안함 때문인가.
얼마 전, 두 번째 회식 때의 논란은 혼란이었다. 고양이 엄마 박차장은 나와 학교를 다녔던 같은 학년 80년생이다. 그런데 사장님은 80년생이 아니었다. 빠른 81년생도 아니고 몇 달이나 늦은 생일이었다. 같은 81년생인데 뭘 따지냐 싶지만 학년이 엄연히 달랐다. 물론, 사장님이 한 살, 아니 한 학년 차이나는 동생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는 사장님이고 나는 사장님이 세운 회사의 이윤의 한 조각을 녹봉으로 받는 직원일 뿐이다. 그런데 잠깐은 혼란스러웠다. 같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도 당연히 박차장과 나를 동갑이라고 여기는 사장님의 생각에 의아해졌다. 술 몇 잔이 들어간 박차장은 사장님에게 '나보다 한참 어린데 주름이 저렇게 많아서'라며 어린 데 자신을 만만히 여기냐 핀잔을 주는 것인지 어리면서 노안인 제 얼굴을 모르고 자신을 놀린다고 푸념을 하는 것인지 입을 삐죽거리며 하는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사장님! 그럼, 정말 81년 생이세요? 80년생 아니고요?"
"나 81년 5월. 00학번. 문주임은 99학번이지?"
"저는 재수해서 00학번인데요?"
"어! 그래도 학번은 나랑 같네."
무슨 기승전결인지. 학번이 같으면 또 동갑인가? 그럼 나와 학교를 다녔던 같은 학번이지만 나이 많았던 오라버니들은 왜 오라버니들이란 말인가. 아무튼 그놈의 빠른 81년 생일이 거추장스럽다. 고리타분한 논쟁에 나도 old fashion 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다음날, 아침나절. 3층 자재실의 기운은 밀린 주문을 해결하느라 분주했다. 과장님과 사장님은 오전 내내 발주서에 있는 밸브를 조립해야 했다.
"문주임! 왜 재수했어? 수능 점수를 더 올리고 싶었나?"
어제 그 나이 논란 중에 사장님은 내 재수에 대한 이유가 궁금했나 보다. 미국에 살 다 온 이력부터 시작해 별의별 걸 다 궁금해하지만 딱히 친해지거나 술김에라도 직원들 사이에서 사담을 나눌 틈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렇게 아주 가끔 자재실에 방문하셨을 때 개인사를 묻곤 한다.
"글쎄요. 뭐... 그때 대학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도 해서.."
"왜?"
내가 늘 떠올리는 나의 삶의 전환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때를 떠올리자면 바로 고3수능직후다. 당시 남동생은 중3이었다. 같은 반 일진녀석이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반격을 가했는데 날아온 주먹을 피하지 못해 코뼈가 으스러졌다. 당시 엄마는 집에 안 계셨다. 엄마는 버스를 타다가 개문발차하는 사건이 벌어져 버스에서 낙상하여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였다. 수능 직전의 불운한 일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암투병으로 병상에 누워 계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정점을 찍었다. 나의 고3 때의 주말은 할머니를 돌봐주시느라 병원에 계신 엄마를 보러 두 시간 지하철을 타는 여정이었다. 그 모든 일이 내 고3 수능을 기점으로 전 후 발생했다. 정말 좋지 않은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 문득문득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아주 까맣게 잊히기도 하나보다. 난 그때 수능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기억에 어렴풋이 있는 그림은 수능시험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엄마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간 것과 환자 복에 베이지색 롱코트를 걸친 엄마의 모습뿐.
원서를 넣었던 학교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낙방한 곳이 없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고,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과 타협하여 합격률을 높였지만 모험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모험을 생각해보지 않았고, 나에게 발생한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재수를 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었다. 상황 탓만 하기에 너무 비겁하지만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있나 싶은 상황이기는 했다.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벼르고 별렀던 수능 날인데 기본 쌓아진 소양과 지식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어야 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실력이었음에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남동생이 입원한 병실에서 밤을 지새워 졸업식도 가지 못한 내게 담임선생님께서 졸업장을 들고 직접 찾아오셨고, 엄마도 동생도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긴 전쟁통 같은 시간이 지났고, 암투병으로 오랜 기간 고통 중에 계셨던 메마른 외할머니를 떠나보낸 후유증은 컸다. 어느 누구도 내 대학 합격 소식과 대학 입학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후, 1년. 재수하는 기간 동안 점수가 비약할 만큼 오르지 않았다. 삼백 사오십 중후반을 살짝 넘나들면서 마무리되어 화학공학과를 지원하여 모두 합격했었던 과거를 뒤집어 교차지원하여 문과로 전향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내 딸아이들이 벌컥 화를 내며 묻는 "엄마 T야?" 의 주인공인데 말이다. 영어에 미쳐 있었던 중학 시절을 제외하면 도통 문과라고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차가운 아이. T 아니고 '더' T. 문과에 진학 후, 내 진로에 대해 많은 시간 방황을 했다. 대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해 휴학을 3학기 동안했고, 졸업해서도 전공과 무관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아를 찾는 시간이랍시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배낭여행을 다녔고, 사진에 미쳐 또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가의 카메라를 사서 방랑자같이 돌아다녔다. 내 고가의 필름카메라는 그다음 해,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똥값이 되어 팔지도 못했다. 3학기 휴학 후, 돌아온 학교에는 졸업을 앞둔 동기와 선배들이 진로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나는 홀로 수업을 들었다. 동기들과 다녔던 새내기 1년, 신나게 놀아 웬만해선 누구도 맞을 수 없었던 학점을 맞았었고, 홀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죽어라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두 학기 동안 바닥을 친 학점을 재수강으로 다시 채워 넣고, 졸업할 때 어느 회사에 원서라도 넣어 볼 수 있는 B+ 를 만들기 위해 여섯 학기 거의 만점을 맞았다. 영혼을 갈아 넣은 여섯 학기. 그 외 딱히, 기억나는 대학시절의 추억은 없었다. 시작도 끝도 방황 그 자체였던 스무 살.
며칠 전, 시댁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우연히 모교를 지나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 텐데 그날은 차에서 내려서 교정을 한 번 걷고 싶었다. 기억 저 깊숙한 곳에 접어 두고 싶었던 별 볼일 없는 대학 시절.
"엄마! 엄마가 걸었던 길이야?"
"엄마! 엄마가 다녔을 때도 저 건물이 있었어?"
"엄마! 엄마가 저기서 수업 들었어?"
무거운 전공서적을 들고 올라갔던 길을,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25년 전보다 훨씬 울창해진 나무의 우거짐이 있는 교정을 걸었다. 동기들과 라면 먹던 학생회관도 그대로, 중간고사 기간 밤새 공부 말고 딴짓했던 도서관, 어느 후배한테 고백받았던 이름 모를 저 언덕배기의 벤치, 가을 단풍에 취해 앉아 있던 저 나무 밑의 의자. 학보가 있던 자리도 그대로였다. 교정에서 시켜 먹던 중국집과 제육볶음을 기가 막히게 잘했던 한식당은 온데간데없지만 기억은 그 자리에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고, 은행잎이 수북한 길에서 제잘 거리며 걸었던 25년 전의 나를 들추어보니 아련한 듯 먹먹한 듯.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까마득한 후배들의 총총한 눈빛을 보니 그때의 내가 그리워졌다.
빠른 81년생에 대한 나이의 논란에서 출발한 추억 여행은 대학교 시절로 방점을 찍었다. 방향이 맞아 제대로 간 것인지 방향이 맞지 않아 돌고 도는 것인지 모르는 삶이 때로는 버겁기도 하고 때로는 우습기도 하지만, 삶에 정답이 없다는 현명한 답을 이끌어 낼 나이가 되니 딸과 걷는 교정 길이 즐거웠다. 가끔 벅차오르는 아련한 감정도 켜켜이 묵은 생활의 감정들로 치부시키지 않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돌이키고 싶었던 선택도 있지만 그 선택이었기에 내 옆에 네가 있고, 지금의 내가 있다. 스무 살의 수고가 누구나 인정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않았다 해서 후회와 낙심으로 정의될 필요는 없었다.
딸아!
그날 그때,
나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또 아름다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