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만났던 날은 시애틀의 10월.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시애틀은 일 년 중 비가 오는 겨울을 제외하면 항상 날이 쾌적하다. It's cliche'. It's quaint. 쾌적하다는 진부한 표현으로 시애틀의 날씨를 설명할 수 없다. 하늘에 빈틈이 없을 만큼 청량함이 공기에 가득하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듯한 맑은 햇빛이 눈을 시리게 한다. 튼실하고 하얀 빛 선명한 구름이 손에 잡힐 듯 시야 저만치에 내려와 있다. 꼭 어린 아이들의 하늘을 그린 그름에 그려져 있는 바로 그런 구름같다. 특히, 내가 스물여섯 혈혈단신으로 태평양을 건너가 적적한 마음을 기대어 살았던 고즈넉한 West Seattle은 Seattlites 가 사랑하는 Alki Beach를 끼고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 동네 중심부로 들어가면 오래된 벽돌로 된 주택이 많은데 단풍의 물듬이 흐드러지는 날엔 주황빛과 갈색빛의 어울림으로 Eric Claton의 Autumn Leaves의 jazzy함이 축축한 가을내음과 뒤섞여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곳이었다.
시름도 걱정도 없었다면 바라만 봐도 좋을 곳에서 평화롭게 늙고 싶었다. 도전은 용기가 아니라 욕심 같았고, 분에 넘치게도 세계 제1위 나라에 와서 Charley's Grilled Sub의 philly cheese steak와 cheese fries를 원 없이 먹어 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Part time으로 일했던 charley's grilled sub은 배고팠던 유학생 시절 넉넉한 칼로리를 제공했고, 팁을 포함해서 시간당 11불이 넘는 일당은 고급진 동네의 허름한 아파트에는 살 수 있는 부족하지 않은 생활비를 제공해 주었다. 하루 여섯일곱 시간의 노동과 community college 수업을 병행하며 대학원 시험 GRE와 TOEFL을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룸메이트의 미국인 남자친구는 서너 시간의 쪽잠을 자는 나를 'Soldier'라고 불렀다. 그만큼 나의 하루는 빈 틈이 없었다. 빈 틈이라고는 밤 9시 즘 일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 뿐이었다. 그 시간 downtown에서 버스를 탄 다는 것은 citizen이 생각하기에 무척 위험한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26년간 살다 온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황홀한 Seattle야경은 한 모금의 비타 500이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버스에서 홀로 차창에 기대앉은 30분 정도가 유일한 쉼이었다.
Toefl점수가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고, 마음도 몸도 몹시 피로하여 미국 생활 일 년 여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때였다. 애초에 무일푼으로 미국 대학원에 입학하고자 했던 도전은 무모함 중의 무모함이었다. 부모에게 따박따박 입금되는 돈으로 공부만 하는 아이들의 시간적 여유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유학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속에 외롭게 견디고 있는 괴로운 나의 형편을 즉시 할 때 즈음 교회 찬양팀 리더 집사님이 내게 찬양팀에서 드럼을 칠 것을 제안하셨다. 밥상을 젓가락으로도 한 번 두드려 본 적이 없는 고상한 내게 드러머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워낙 청년이 없고,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대다수인 탓에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이 갸륵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라도 그러겠노라 승낙을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드럼을 두드릴 수도 없는 법. 집사님은 적당한 선생을 구해보겠노라 하였다. 그렇게 흐지부지 될 것 같던 그 제안에 답장이 왔다.
10월 말. Barnes & Noble에서 만난 그는 야구점퍼를 입고 Boston RedSox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집사님이 찾던 드럼 선생이 바로 그였다. 몇 마디 말을 나누었던 듯했고, 대화 내용은 딱히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로 무심했다. 집사님이 레슨비를 내주시겠다고 하였고, 그와 만나 레슨 시간을 정했던 것 같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영양가도 인상 깊었던 일도 없던 그날의 기억에 유일하게 뇌리에 남는 건 그의 뒷모습이다.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Musician이라서 그런 탓이겠거니 했지만 그때 그 느낌은 그를 만난 지 20년이 지나도 남아있다.
그는 Berklee College를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한국에서 2주 만에 결혼식을 해치우다시피하고 둥지를 틀었던 시애틀을 떠나 정반대 대서양을 접한 Boston으로 떠났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았더라면 아니 지금처럼 네이버 경제뉴스를 매일 한 글 귀퉁이라도 읽었더라면 그렇게 아무 생각도 우려도 없이 Boston으로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도 졸부도 아니고 논 팔아 밭 팔아 아들 공부시키려는 어머님 형편을 알았더라면 예견되는 치솟는 환율을 감안해서라도 몸을 웅크릴 시간을 벌었을 것인데 그와 나는 철이 없었다. 그저 좋았더랬다. 5불짜리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명품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앞으로 Boston에서의 신혼생활에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 같았는데 도착해서 한 달도 체 지나지 않아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는 나를 걱정했고, 치열하게 살았다. Seattle보다 배나 생활비가 비싼 Boston에서의 삶은 처절하고 절박해졌고, Berklee를 휴학하고 Seattle로 돌아왔다. Seattle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Cornish Jazz School을 장학생으로 졸업하기까지 근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아이가 생겼고, 남편은 졸업은 했지만 더 이상 드럼을 칠 수 없었다. 졸업 후, OPT로 주어진 시간에 Musician으로 취직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Music Engineer로 방향을 틀었지만 역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주변 지인 중에 Microsoft, Google, Amazon에 다니는 computer engineer들이 즐비했건만 누구 하나 그 길을 제안한 적이 없었던 게 이제와 원망이 될 때도 있다.
우리는 미국 생활 10년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고군분투'라는 사자성어가 우리 삶을 대변한다. 외로운 군사가 적은 인원으로 지원군 없이 용기 있게 잘 싸운다라는 뜻이지만 '잘'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늘 싸우고는 있는데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음에 늘 낙망했다. 귀국하고자 했던 아이 둘 딸린 musician은 고국에서 처량한 찬 밥 신세였다. 음대 장학생 유학 졸업장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식자재 배달부터 학원 강사, 공연 아르바이트, 펜션 청소직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찬바람을 거세게 맞았다.
"자기야. 우리 십 년 됐네. 미국에서 온 지.... 면허증 갱신했어."
상사의 폭언으로 이직을 결심했고, 다시 이직한 곳에서 더 한 놈을 만나 사직서를 낸 그는 다시 입사를 앞두고 있다. 한 달여간의 실직생활은 생활력 강한 그의 마음을 상당히 괴롭게 했고, 이력서를 넣는 부단한 매일의 노고로 다행히 지난 회사의 경력을 인정받아 경쟁업체로 입사가 결정되었다. 음악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인데 요즘 무척 힘들어한다.
그의 최근 1년은 어금니가 빠질 정도로 극한의 고통이었다. 가장으로 견딤에도 한계에 부딪쳤다. 번 아웃이라 했던가. 그는 지난 십 년간 타버렸다.
문득, 그를 만나 시애틀의 한 카페 patio에서 찍은 사진을 찾았다. Boston RedSox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그는 너무 젊었다. 앳된 그와 내가 그리웠다. 그리고 그 젊은 날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토란이나 원추리의 쓴 맛 같은 아리고 따끔거림처럼....
내게 제일 좋은 침대를 사주고는 저는 매일 휴대폰을 보다가 소파에서 잠이 든다.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쏟아짐을 간신히 참고 돌아서 누운 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와 아이들 앞에서 역풍을 맞느라 고되고 늙어버린 나의 북 치는 소년을 안아주었다.
"드럼 치고 싶다."
십 년간 음악을 했었던, 드럼을 쳤었던 자신을 증오하면서 살아온 그가 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말을 했다. 항상 음악 연주 동영상만 보다 잠이 드는 그가 음악은 다시 안 할 거라 했는데....
먹먹해짐에 그도 나도 깊은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