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지루했다.
엿가락같이 늘어진 듯. 길어진 낮 시간은 노동자들에게 지루함을 선사한다. 겨울 3층 자재실에서 바라보는 저 멀리 풍경은 까맣고 회색빛의 앙상한 나무와 누렇게 말라버린 연한 베이지색의 건조한 들풀, 그리고 더 멀리의 이름 모를 사각의 작은 판넬 건물들뿐이었다. 5시도 되기 전에 어둑해져 버리는 8절지의 흑백사진은 퇴근시간을 재촉했고, 착시효과로 인해 8시간 노동은 조금 짧아진 듯 느껴졌다.
잠깐 봄인가 싶었다. 앙상한 나무에 핑크 빛으로 점을 찍더니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하늘에 색이 입혀지기도 했다. 가끔 미세먼지라는 불청객 탓에 영국의 산업혁명 때나 볼 법한 스모그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 1인치 정도 다채로워진 바깥 풍경에 혼자 있는 시간이 덜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소유이며 나름대로 도로 옆이라 논두렁보다야 가치 있는 부동산인 이 짙은 회색 빛 판넬 건물과 주차장에서의 하루가 여름이 가까워지는 탓에 점점 더워지면서 단조로움이 싫어졌다. 아침마다 듣는 영어 뉴스도 english pod cast 도 Phil Colins,Brian Mcknight도 Beatles나 John Mayor, Swifit Taylor도 재미를 주지 못했다.
반도체 산업 동향의 미래는 밝지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울한 지금의 현실에 즉시 할 수 있는 건, 사업체마다 정세를 살피느라 잔뜩 웅크리고 있어 당장 회사 매출과 직결되는 발주서가 뜸하다는 것이다. 한동안 뜸한 발주서 탓에 물품 납품으로 정신이 없어야 하는 영업부와 영업부의 산하 격인 3층 자재실은 한 달 휴가를 받은 듯했다. 누군가는 부럽다 누군가는 꿀이다 말하지만 일을 하다가 정신없이 맞이하는 점심시간과 서둘러 맞닥뜨리는 퇴근시간이 뿌듯한 ENTJ의 나로서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찬바람 불면 당장 잘려 나가는 말단 직원이라서 또는 남편이 실직 상태에 돈 나올 유일한 구멍이 바로 나라서 더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갑내기 사장은 아주 잠깐 회의 시간에 이런 상태의 지속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걱정이 없는 눈치였다. 본인들의 사업은 식당 같은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자부심 있게 이야기했고, 나야 그분들의 주머니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당장 회사가 어떻게 될 것 같은 IMF를 상상했던 것도 요즘 경제뉴스를 보면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2주 뒤, 큰 사장님은 새 차를 샀다.
BMW X-7. 1억 5천만 원이란다.
내 걱정은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회사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나 해야 한다는 것을. 부의 축적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안정기에 접어든다. 15년 된 3층 판넬 건물과 땅 주인인 사장님의 회사는 나 따위가 우려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네이버 회사 소개에 매출 100억이라고 설명되는 이상 사장님의 지갑 사정은 나의 지갑처럼 마이너스와 영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전전긍긍 수준이 아니라는 것. 그날, 큰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오리주물럭을 사주었다. 요즘은 거의 주마다 한 번은 직원들에게 막국수, 갈비탕, 칼국수를 사주신다. 큰 사장님은 출근하셔서 4시 정도까지 회사에 계시면서 자리만 지키신다. 그게 직원들 기강에는 최고의 인 듯하다. 딱히 할 일을 안 하셔도 반도체 장비 부품을 유통시켜 납품하는 이 물류회사는 잘 돌아간다. 누군가는 계속 주문을 하고 납품을 하고 돌고 돌아가는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된다. 사실, 일은 큰 사장님의 사촌 동생인 동갑내기 사장님이 다 하지만 20여 년간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자리 잡은 회사의 매출과 알아서 일하는 직원들 덕에 이제는 그분도 한 시간 일찍 퇴근길에 나선다.
어제는 종일 쉴 시간이 없었다. 4월이 되자 주춤했던 발주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3층 자재실 상용 재고 수량을 매일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납품에 지장이 없도록 하려면 부족수량 품목을 적당한 시기에 미리 발주를 해야 한다. 어떤 부품은 3-4주 또는 두 달이 넘게 걸릴 때도 있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오는 수입품이라 신경이 여간 쓰이는 직무가 아니다. 별일 아닌 이 일을 하면서, 머리가 더 하얗게 쉬어 버렸다. 내가 입사하기 전, 직원들은 먼지 가득한 3층에 오기를 꺼려했다. 부지런한 아줌마를 만나 곳곳에 떼를 벗기고 먼지를 털어 환골탈태한 이곳은 아주 쾌적하다. 이 수천 가지 품목은 일목요연하게 액셀 파일로 저장되었고, 도면까지 갖추게 되었다. 얼마나 일을 했는지 모른다. 완벽주의인 내 성격에 눈뜨고 봐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매일 나올 수밖에 없었고, 성격 상 살기 위해서라도 아니, 숨이라도 잘 쉬기 위해서라도 닦고 또 닦았다.
오리주물럭을 먹었고, 서리가 천 번이나 내린다는 막국수를 먹었고, 부처네라고하여 간판을 보고는 크리스찬이 들어가기 민망한 곳의 돈가스를 먹었고, 김포에서 온 칼국수도 먹었다. 큰 사장님은 옷을 헐렁하게 입고 다니는 나를 '헐랭이'라 부르시며 껄껄 웃으신다. 성격도 좋으시고 돈도 아주 많으신 사장님. 이 불황에도 직원들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맛있는 것을 사주시는 인품 좋은 우리 사장님.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다.
그만 소모되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데도 누군가의 영리를 위해 계속 소모되고 있다. 나의 시간도 나의 육체도 나의 정신도. 돈을 목적으로 하는 단순 소모로 점점 고갈되어 가는 나의 삶이 싫었다. 누군가의 열심으로 일궈낸
꿈, 꿈이 아니더라도 이상적인 본체 속에 갈아 끼워지는 배터리로 그만 살고 싶었다. 갑자기 그랬다.
올봄에는 꽃구경을 못했다. 출근, 퇴근. 퇴근 후, 저녁 준비하고 아이들 밥 먹이고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금쪽같은 시간은 설거지 후 8시에서 9시, 약 한 시간 정도 되는 밤. 봄밤에 가로등을 조명 삼아 까만 하늘에 수놓은 벚꽃은 눈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청아한 밤을 종일 모니터를 보느라 침침해진 눈으로라도 감상하려면 서둘러 탈출하듯 나가야 한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은 밥 꼬시래기 같고, 적색 목련은 우아한 한복 입은 여인네 같고, 꽃망울이 터지는 화려한 철쭉은 서양 왕비들의 드레스 같은데 밤에 보니 그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칙칙했다. 그 꽃들의 색을 느끼고 싶은데 밤이 되니 노화가 온 눈은 더 침침하고 피로했다. 그 길을 홀로 하염없이 걷다가 무심코 지나가는 많은 버스들에 '운전기사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았다.
'온 세상에 모두가 다 꿈을 이루었다면 저 버스는 어떻게 이 밤에 달리고 있을까?'
서글퍼하지도 말자.
나보다 더 적은 것으로도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말자.
억울해도 속상해하지 말자.
'뭣이 중한디'
얼마 전, 누군가의 글에서 처럼
다 갖지는 못하지만 '다 가진 기분은 가질 수 있잖아'
서글픔에 화가 나는 것도 기력이 있는 이삼십 대의 감정이다. 숨표도 쉼표도 없이 충전을 하지 못한 배터리 때문에 화 낼 힘도 없었다. 그저 뉘엿뉘엿 지는 해처럼 올라오는 감정도 꿀꺽 넘어 삼켜버리려는 마흔다섯 어느 날의 찰나, 뒤에서 따라오는 어느 부부의 말이 들렸다.
"오늘 별이 참 많네."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먹한 하늘에 점점이 박힌 빛난 별들.
그리고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라일락의 향.
'별이네. 별이 보이는 동네에 살고 있네.'
별이 있는 동네에 산다.
비염도 없어졌고, 차소리와 간판의 빛으로 방해받지 않은 밤은 밤다워 까맣고,
잠도 잘 온다. 빚이라도 내 집을 샀고, 마흔다섯에 4대 보험을 유지하는 정규직에 입사를 했다.
로마의 어느 황제는 소변을 모아서 팔아 국고를 채웠는데 신하들이 그 정책을 꺼려하자 돈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 맡아보라 하였다고 했다.
가끔 온갖 좋은 미사여구로도 힘든 하루가 보상이 되질 않을 때가 있다.
감정이 차 오를 땐 허기도 느껴지지 않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감흥이 없고, 괜찮은 노래를 틀어도 머리도 귀도 아닌 공간을 그저 흘러가 버리는 때.
그날, 한 밤의 별이 위로 한 줌이 되었다.
별거 아닌 라일락의 향이 그까짓 것들의 쓰디쓰게 올라와 나를 삼키려는 감정을 사라지게 했다.
아궁이에 던져질 풀들도 아끼시는 분이 저 별로 그 향으로 나를 지켜주셨다.
그리고 털어 버렸다. 먼지처럼 툭 툭.
다시 걸어볼까? 힘있는 디딤으로. 기다림이라는 인내로 너그러움의 인품으로
열심을 이뤄내는 내 하루는 결코, 소모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