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화장지, 일력

끝내주는 화장실 휴지

by 꼭두

최고의 화장지, 일력

끝내주는 화장실 휴지


전국 곳곳을 장악했던 '월력' 달력의 활약


70년대가 시작되면서 달력이 가정의 필수 생활소품이 됐죠. 시작은 60년대였지만.


달력을 주로 나누어주는 곳이 은행이 된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고, 당시에는 여러 회사마다 각종 달력을 만들어서 뿌리곤 했어요. 회사와 제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 년 내내 전국 곳곳에.


우리나라 여러 관광 명소 풍경이 달력의 단골 배경 그림이었고, 미용실, 이발소에 주로 걸려있는 바다에서 해 뜨는 사진. 동네 주점마다 걸려있던 건, 헐벗은 옷차림에 비해 짙은 화장을 한 사자머리 여인들의 사진. 그 정도가 기억납니다.


새해가 되기 전, 이듬해 달력을 구해 집에 걸 때면 마치 큰일을 해낸 것처럼 엄청 뿌듯해하곤 했답니다.


한 달이 지나 달력 한 장을 뜯어내면, 뒷면은 새하얗게 훌륭한 도화지가 됩니다. 물건 귀하던 시절, 그 달력 종이를 결코 그냥 버리지 않아요.


아이들은 거기에 낙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한글, 천자문, ABC 공부도 합니다. 더 이상 빈자리가 없으면 이제 딱지를 접어요. 달력으로 만든 딱 적당한 두께의 빳빳한 딱지는 골목 딱지치기에서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최고의 딱지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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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2장짜리 ‘월력’ 달력 말고도, 1년 365장짜리 ‘일력’ 달력이 있었어요.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흔했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잘 안 보인다 싶더니, 요즘에는 정말 보기 드문 달력이 됐지만요.


안방 침실마다 침투한 70년대의 '일력' 달력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였죠.


차 운전석 바로 옆에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와 함께 잘 걸리고, 밖에서는 주로 시계방이나 금은방에 가면 어김없이 일력 달력이 걸려 있었어요.


집에서는 주로 화장대 위에 걸어놓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 하루 한 장씩 뜯어내는 달력이었죠. 이부자리를 마련한 후 눕기 직전에 그 한 장을 떼어내며, '아,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끝냈구나' 하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하지만 일력이 히트 상품이 된 곳은 따로 있었어요.


70년대 일력의 가치를 발견한 건, 그 크기가 점점 커지던 어느 날. 그게 최고의 화장실 휴지라는 걸 발견한 순간부터입니다.


‘2층 양옥집’이라는 그 시절 유행어가 70년대부터 생겨났죠. 새로운 부잣집의 상징이었다고나 할까요.


재래 단독집과 신축 양옥집의 가장 큰 차이는 화장실이었어요. 양옥집은 이른바 ‘수세식 화장실’이었거든요. '푸세식'에서 환골탈태한.


그러면서 나타난 게 ‘두루마리 화장지’예요. 신문에서 처음 두루마리 광고를 보면서 ‘세상에~ 변소 휴지를 다 광고하다니!’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의 문화 충격은 훗날 80년대에 생수 광고가 처음 등장했을 때로 이어집니다. '세상에~ 이젠 하다 하다 물도 파는구나! 서울은 죄다 봉이 김선달 세상인갑다.' 했어요. 앞으로도 또 뭔가 이어지겠죠?


저 어릴 적 살던 촌마을 ‘뒷간’에서는 볏짚을 변소 휴지로 사용했어요. 중국이나 인도의 시골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살던 고향 마을이 다 그랬어요.


시집을 가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때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서민들의 화장실 휴지는 주로 신문지였답니다. 신문지를 작게 잘라 화장실에 걸어놓고 썼죠.


그러다가 일력을 만났는데 그게 끝내주는 화장실 휴지라는 걸 다들 알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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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력이 최고의 화장실 휴지였던 사연


일력은요. 365장을 납작하게 한 권으로 만들어야 하니, 무척 얇은 종이로 만들었고요. 종이 질도 신문지와 비교할 수 없이 아주 매끄럽고 부드러워요. 잘 찢어져야 하니 구기기도 접기에도 편합니다.


화장실에 갈 때면 한 장 혹은 몇 장씩 가지고 가서 썼는데,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아예 한 권째 화장실에 걸어 놓고 썼죠.


2층 양옥집에 살 정도는 아니라도 어지간한 준 중산층 가정에서는요. 방마다에는 보고 뜯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화장실에는 뜯어서 쓰기 위해, 일력을 한 권씩 걸어놓는 게 제법 ‘부티나는’ 풍경이었답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가 다른 두 가구와 함께 1층짜리 넓은 단독주택에 살던 시절입니다. 마당 끄트머리에 있는 실외 화장실을 세 가구가 함께 사용했죠.


어느 날 옆집에서 뭔 잔치를 합니다. 늘 신문지가 걸려있던 화장실에 그날은 그 집 할머니가 손님들을 위해 일력 한 권을 걸어 놓더라구요.


그런데 잔치가 끝나자마자 그 일력을 냉큼 치우네요. 그냥 놔두면 다른 집에서 쓸까 싶어 그러는구나 생각하니 아주 치사하고 괘씸하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제가 제 집에 있던 일력 한 권을 바로 가져다 걸었어요.


그리곤 할머니한테 한마디 했죠.


“할머니 집은 일력이 귀한가 봐요?”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코미디지만, 그 시절 일력의 가치와 풍경이 그랬다는 이야기구요. 아무튼 그 시절, 해마다 연말이 되면 일력을 여러 권 챙기느라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합니다.


화장실에서 신문지 휴지도, 일력 휴지도 다 사라지고, 어느 집 화장실이나 두루마리 화장지가 놓이게 된 건, 양옥집이 아파트에 밀리기 시작한 80년대가 되어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부터.


지금은 어떄요? 두루마리는 아직 비데한테 자리를 완전히 내어준 건 아니죠? 아, 용도가 조금 다르다구요?


그런데 저처럼요. 일력이 그 시절 최고의 화장실 휴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 많이들 살아 계신가요? 새삼 떠올려보니 뭔가 옹색했던 기억 같아서 '그걸 굳이...' 싶으시다고요?


그러니까... 다들 기억하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네, 저도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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