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속의 타임캡슐」 다섯 번째
안녕? 오늘도 우편배달부 꼭두야.
어제 편지는 그냥 아버지한테 보내는 편지가 아니더군. 시작부터 끝까지 자뻑인 글 읽어드리느라 아주 힘들었어.
온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친구. 적어도 대학 입학까지는 그런 증상을 심하게 앓았던 게 확실해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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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의 편지만 두고 갈게. 내가 끼어들 틈은 여전히 없으니까.
"아버지에게 보내는 그의 세 번째 편지가 왔어요. 네 번째 편지도 아직 남아있고요. 또 올게요."
동대문야구장 시대의 기억
아버지, '동대문야구장' 기억하시죠?
여름이 다가오는 휴일이면 어김없이 아직 어린 국민학생인 제게 말하곤 하셨죠.
"가자, 동대문."
당시 우리 집에서 동대문이란 단어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었죠. 어머니에게는 한복 원단시장과 같은 말이었고, 아버지에게는 야구장이란 뜻이었어요.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사라지기 시작한 동대문야구장.
이후 아버지에게서 동대문이란 말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됐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도 "가고 싶다, 동대문."이란 말을 하셨고, 그때마다 저는 광장시장에 함께 다녀왔답니다.
더는 어머니 혼자서 광장시장을 찾지 못하셨거든요. 평생을 제 집마냥 드나들던 그곳을 말이죠.
아버지께 그 말을 들으면 저는 두껍고 큼지막한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은 라디오를 챙겨 아버지를 따라 나셨죠. 당시 '트랜지스터'라고 부르던 그 라디오. 아버지는 야구장 앞에서 소주병과 오징어를 챙기셨고요.
야구장의 여름에는 소주와 오징어가 너무 익숙하던 시절. 혹시라도 못 챙겨 온 사람들을 위해 야구장 안에서도 팔던.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였던 거 잘 아시죠? 고교야구 전성기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막강했어요. 그 고교야구의 성지가 바로 동대문야구장이고요.
서울에도 충암, 휘문, 신일, 동대문상고, 선린상고 같은 강팀이 많았지만, 지방고교가 인기는 훨씬 좋았어요.
부산의 양대 명문 부산고와 경남고. 광주의 광주일고와 진흥고. 경북의 강자 대구상고와 경북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우리 고향의 공주고와 제 모교인 중앙고도 야구부가 있었지만, 솔직히 강팀은 아니었고요.
공주고는 나중에 박찬호를 배출하며 유명해졌던 거 기억하시죠?
지방고교 야구팀의 인기는 서울에서 반실향민 모습으로 살고 있는 지방출신분들 덕분이었어요. 아버지 같은. 다들 목이 터져라 고향팀을 응원하던 시절, 고교야구 열기는 후끈했죠.
아버지는 객지 타향 서울에서의 고단함과 향수를 동대문야구장에서 달래셨어요.
아버지의 고향 향수병 치료제는 주중에는 퇴근길 집 앞 연탄구이 돼지고깃집이었고, 주말이면 동대문 야구장이었잖아요. 두 곳 모두에 늘 제가 함께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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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꼭 저를 데리고 다니셨나요? 다른 아버지들은 아들과 목욕탕 다니는 로망이 있다던데, 아버지에게는 그게 야구장이었나 봐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참 내, 하나뿐인 아버지의 하나뿐인 아들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잠실야구장 시대의 개막
대통령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고교야구의 전설적인 스타가 즐비하던 70년대 말.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들을 그저 실업야구로 보내지 않았어요. 마침내 한국에 프로야구를 만들었죠.
대통령 그 양반이 시구를 한 토요일 개막전은 거르고, 아버지와 저는 일요일에 치러진 OB와 MBC의 프로야구 개막전을 동대문야구장에서 지켜봤던 기억 생생하시죠?
아버지도 저도 당연히 충청 연고의 OB 베어스 팬을 자처했는데, 그날 박철순이 서울의 MBC 청룡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뒀고 아버지의 기쁨은 몇 배가 됐죠.
아버지와 제게는 동대문야구장 시대가 마감되고 잠실야구장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죠.
투수는 최동원, 선동열에 미국에서 돌아온 박철순. 타자는 이만수, 장효조에 일본에서 건너온 백인천. 고교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들을, 프로야구라는 더 큰 무대에서 계속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자는 행복했어요.
송구하지만, 이것도 다 저를 챙기는 게 습관인 대통령 때문이에요. 1982년, 제 대학 입학에 맞춰 프로야구를 선물한 거죠. 덤으로, 머리아프고 혐오스러운 정치 대신 볼거리 많아지니 좋잖아요? 통금도 없애줬겠다, 밤새 마음껏 술 마시다 보면 또 새로운 리그가 만들어지던 때죠.
'Forgot the Love, and Touch the Gold.' 50년 전의 조잡했던 흥행영화 '나자리노'에서 악마가 속삭이죠. '사랑을 잊으면 돈을 주겠다'는 달콤한 딜. 대통령이 악마였다면 성공했네요. 그는 사라졌지만, 프로야구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살아남았으니까요.
솔직히 당시 제 느낌은 어땠냐면요.
아버지는 보지 않으셨지만 'H2'라는 만화가 있는데요. '슬램덩크' 세대 이전에 우리나라 야구팬들이 제일 좋아하는 고교야구 만화예요.
그 H2 스타들이 프로야구를 휘젓는 느낌이었다니까요.
다시 보고 싶은 고교투수 최동원
그런데 3년 후, OB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요.
아버지는 배신감을 심하게 느꼈고, OB가 떠난 충청에 새롭게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를 평생 응원하셨죠.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꿔도 개의치 않고.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계속해서.
저도 당연히 응원팀을 갈아탈 줄 알았던 아버지는 제가 여전히 OB를 응원하자, 몹시 어이없어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충청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OB와 제가 뭔가 삶의 이력이 같다는 생각에 그리 한 건데, 늘 아버지 눈치가 보이더군요.
아버지에 대한 그 미안함이 계속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지나지 않아 OB 베어스가 이번에는 두산 베어스로 이름도 바꾸더라고요? 저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도 갚을 겸 그 어렵다는 프로야구 팀 세탁을 했어요.
저도 다시 충청으로 돌아가 한화 이글스 팬을 하기로 했다니까요. 아버지는 모르셨죠?
아무리 돌아온 탕아라지만 대가는 혹독했어요. '만년 꼴찌팀의 보살팬'이라는 둥 별별 조롱을 다 들어야 했죠. 아주아주 오랫동안 한화팬이라는 그 '극한직업'을 견뎌야 했답니다.
호프집 같은 곳에서 한화 경기 틀어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안쓰러워하는 사람들 눈이 겸연쩍어서.
네? 늦었지만 그래도 아주 잘한 일이라고요? 물론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아버지의 하나뿐인 아들인걸요.
참, 아버지.
'타격천재 장효조'와 '무쇠팔 최동원'이 고인이 됐어요. 오래전에.
느낌이 남다르시죠?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거예요. 30년인걸요.
결국 다 떠나는 거 보면 세상 참 공평한 것 같아도 아니라니까요. 두 야구스타도 불과 50대 초반이었고, 아버지도 온전히 환갑을 채우지 못하셨잖아요. 아버지와 비슷하게 태어난 이순재, 김지미 두 분이 불과 한 달 전쯤에 영면하셨어요. 아버지가 제게 무려 30년을 남겨놓고 서둘러 가셨는데... 또... 전 억울해요.
이래저래 아버지를 다시 뵈러 가기 전에 한화가 꼭 우승을 해야 할 텐데... 마음이 급하네요.
하지만 아버지. 한화가 우승을 한다 해도 제게는 아버지와 동대문야구장에서 최동원을 보던 시절이 더 재밌었어요. 한여름에 절정을 치달리던.
당시 '나이트게임'이라고 부르던 한여름 밤 동대문야구장에서, 최동원이 특유의 다이내믹한 폼으로 포스 미트에 공을 꽂으면 관객 모두가 탄성을 보냈죠. 야구장 조명탑 아래 야구공은 유독 더 하얗고 빠르게 보이거든요.
아버지는 소주잔을 채우시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동아방송 캐스터 유수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지난날을 많이 그리워한대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노스탈쟈 세포가 커진다네요. 저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나 봐요.
아비 앞에서 감히 그런 소리 말라고요? 하하, 아버지. 제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어요. 아버지는 지금 저보다도 어린 나이에 제 곁을 떠나셨답니다.
아버지, 이틀 후에 다시 올게요.
왜 직접 안 오냐고요? 저 지금 병원에 있어요. 아버지가 마지막 다니셨던 그 병원. 왜냐고요? 그건 이틀 후에 말씀드릴게요.
그럼 또 봬요.
오늘 밤은 꿈에서나마, 어느 뜨거운 여름날 밤, 동대문야구장 마운드 위에 선 경남고 투수 최동원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