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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다다른 곳

38. 기적의 순간, 꿈을 꾸다

by 단풍국 블리야

코로나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일 년의 기다림 끝에 합격했던 포지션의 잡 오퍼가 왔다. 나는 희망지역 세 곳을 선택했었고 지금처럼 로컬 오피스에 배정되기를 원했다. 모든 서비스를 처리하는 오피스 커뮤니티 서비스 팀에서 전체 일을 먼저 배우고 난 후 인테이크(intake)와 같이 특화된 팀으로 옮기고 싶었다. 운이 좋게도 방향만 다를 뿐 비슷한 거리에 있는 오피스로 오퍼를 받았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오퍼레터에 사인을 하고 2주 만에 새 일을 시작하게 됐다.


트레이닝은 3개월이었다. 주정부에 입사하며 받았던 3주간이 평생 받은 업무 트레이닝의 전부였던 나에게 3개월은 까마득히 기간이었다. 배울 게 그만큼 많기 때문이지 하는 생각에 미리 압도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 나처럼 2년간 클라이언트 서비스 경험이 있는 한 명이 같은 오피스로 배정되었고 나의 동기가 되었다. 우리 교육을 맡은 코치는 믿고 맡기는 실력을 만들어준다고 명성이 자자한 분이었다. 모두들 이것 역시 나는 운이 좋다고 했다.


직접 예산을 승인하고 집행하는 직급답게 정부 회계규정에서부터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납세자의 세금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사항, 정부예산의 종류, 예산집행절차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 위치에서 단독으로 집행할 수 있는 예산범위가 있었고 항목마다 달랐다. 권한 범위를 넘어가면 슈퍼바이저, 그 이상은 매니저의 승인이 필요했고, 승인의 근거는 나의 결정이었다.


실무 분야에 들어가며 가장 먼저 인테이크(신규 승인)를 며칠에 거쳐 배웠다. 법적 체류 조건, 자산, 고용 상태, 수입 등 지원자격요건을 먼저 공부했다. 연습용 소프트웨어에서 지원자가 되어 온라인 계정을 만들고,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과정을 직접 해 봤다. 지원자가 거쳐야 하는 단계를 이해하는 건 클라이언트와의 대화에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일이었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그들의 말이 해소되었다. 이후 실제 인테이크를 진행했다. 접수된 신청서를 검토하고 추가 서류 요청과 전화 인터뷰를 한 후 제공받은 정보의 최종검증과정을 거쳐 케이스를 오픈했다.


케이스가 열린 후 제공되는 나머지 서비스들은 하루에 하나씩 배워나갔다. 내가 하게 될 일들이었다. 과정은 같았다. 각 서비스의 목적, 자격 대상, 지원금 규모, 관련 법규정을 검토하고, 코치가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승인이 나면 수표발행으로, 거절일 경우는 재심과정 안내로 이어졌다. 나머지 시간은 같은 서비스 요청을 우리가 직접 처리해 보며 익숙해지도록 반복훈련을 했다.


실력자라는 명성 뒤엔 혹독한 훈련이 있었다. 동기와 나 모두 배경지식이 있던 터라 설명은 한번 이상 하지 않았다.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서비스 요청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얽혀있는 이슈가 많아 검토가 오래 걸리는 경우를 포함해 결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먼저 판단하라고 했다. 주어진 시간에 배정받은 서비스들을 마무리해야 해 심리적인 압박도 상당했다. 휴식시간이 되고 코치가 자리를 비우면 동기와 나는 우리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서로 맡은 케이스와 결정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법령에 근거해 승인인지 거절인지 나의 결정을 담은 노트는 매번 검토를 받았다. 초안을 작성한 후 오케이 사인을 받을 때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노트 검사에서 해방된 건 한 달이 지나서였다. 막상 검토 없이 올리려니 머뭇거려졌다. 코치는 "너 잘하고 있어. 안 봐도 잘 썼을 거라고 확신해"라는 말로 스스로 나를 믿게 했다.


가르치는 건 단호했지만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신입의 신선한 의견 듣기를 즐거워했고, 새로운 접근으로 이어지면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흥분하기도 했다. 법령을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고, 그렇게 내린 나의 결정은 존중되었다. 나는 코치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2년간 일을 하며 스치듯 알고 있던 내용들이 트레이닝을 통해 깊게 들어가면서 하나씩 영글어가고 색깔이 입혀졌다. 하나씩 입혀지던 색이 같은 색끼리 모여 한 면을 채우고 큐브가 맞춰져 갔다. 나는 이 일이 좋았다. 나의 판단이 녹아들고 사고를 연결해 완성된 큐브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나는 좋아한다. 그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이 나에게는 동기부여가 된다. 마침내 이곳 캐나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에 다다른 것에 감사했다.


배우는 양이 어마하다 보니 오전이 지나기도 전에 체력이 소진되기 일쑤였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3개월을 꽉 채워 보냈음에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내가 해야 할 일은 광범위했다. 트레이닝을 마치며 기대와 걱정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이륙을 할 때다. 내가 원했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던 둥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날아올라야 한다.




엘리샤 부모님의 기준에 따라 '급'이 다른 우리는 비밀 친구였다.


"블리야, 정말 고마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 아빠한테, 사실 나 블리야랑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어. 지원받도록 네가 많이 애써준 것도."


충분하진 않았지만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정부지원금에 엘리샤는 크게 안도했다. 가게를 물려주겠다며 좋아하는 치과일을 그만두게 하고 엘리샤를 데려왔던 부모님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팔았다. 가게가 다시 문을 열었어도 예전의 호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손님은 다 떨어졌지만, 눈먼 임자가 나타난 건 또 한 번 내린 천운일지 모른다. 대부분 비즈니스가 폐업을 하거나 헐값에 팔리는 시기, 정점을 찍었던 코로나 이전의 가치로 가게를 넘겼다. 그들의 노후자금이 될 거라 했다.


엘리샤는 잘 이겨나갔다. 늘 희망적이었고 늘 웃었다. 항암을 하면서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고 어느새 듬성듬성해지자 긴 머리를 밀어내고 야구모자를 쓰고 다녔다. 탄탄했던 근육이 빠져나가고 피부색은 어두워졌지만, 외형적인 변화가 없다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과 같았다. 하루 한 시간은 꼭 공원을 산책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엘리샤에게 소화불량은 가장 큰 불행이었다. 조금만 신 과일을 먹거나 매운맛이 들어가면 입안에 통증을 유발할 정도로 감각도 예민해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점점 밋밋해졌고, 소화를 돕기 위해 엔자임을 입에 달고 지냈다. 음식궁합이 잘 맞는 우리는 매번 쉽게 메뉴를 정했었지만 엘리샤가 투병을 시작한 후로는 신중했다. 더 이상 새콤한 얌운센은 없었고 매운탕은 맑은 지리로 변했다.


치료가 다가오면 호중구수치를 맞추기 위해 컨디션 조절에 집중했고, 항암 후엔 고열과 속 울렁거림에 시달렸다. 기력이 돌아오면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을 만났는데,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고 사람들을 리드했다. 이사를 앞둔 내가 자잘한 살림용품 구입이 필요하자 본인이 같이 봐줘야 한다며 그 넓은 이케아를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니기도 했다. 반품된 제품들을 모아 할인가로 파는 코너까지 꼼꼼하게 둘러본 후 나보다 더 많은 물건을 집에 들고 갔다.


2년 가까운 투병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의사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다가올 항암을 앞두고 한 검사에서 암수치가 정상에 가깝게 떨어졌고 영상에서도 암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수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뉴스였다. 확실히 하기 위해 복강경 검사를 했고 복강경에서도 암이 보이지 않았다. 깨끗했다. 엘리샤의 긍정이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 우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엘리샤는 아프지 않을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무척 들떴다. 또다시 "우리 이거 해 보지 않을래?" "거기 가보지 않을래?" 하는 단골멘트가 쏟아졌다. 거대한 목표들은 아니어도 내일을 그릴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견딜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엘리샤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술대에 올라 마취제를 맞고 잠들어있던 딱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술을 기다리던 한 달 사이 몸에 변화가 있었던 건지, 영상에서 보여준 건 일부였는지, 더 넓어진 전이만 확인했을 뿐이다. 소박한 꿈을 꾸는 일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조차 꿈이라는 걸 확인하는 일이 차라리 없었다면. 믿음을 놓은 적이 없던 엘리샤에게 이 일은 사형선고를 내리는 최종판결과도 같았다.


뒤집어진 'ㄴ'자로 복부에 울퉁불퉁 새겨진 커다란 수술자국에 화가 치밀었다.


"아니.. 좀.. 예쁘게 좀 해주지.."

"그치? 나 이제 비키니는 못 입을 것 같아."


성의 없이 삐뚤빼뚤 듬성듬성, 어지럽게 봉합되어 있는 자국들이 마치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리샤에게 미안해졌다. 여러 번의 상실을 겪고도 나는 여전히 서툴렀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엘리샤가 말을 꺼냈다.


"있지... 처음 마음먹었던 그때 가게를 나왔으면 나 괜찮았을까?

그때 독하게 마음먹고 엄마 아빠에게 벗어났다면,

나 지금 안 아플 수도 있었을까?"

"내가 더 강하게 너를 설득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돌아가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엘리샤가 고개를 떨구었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엘리샤가 울고 있었다.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어떤 말도 어떤 후회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우린 안다. 그저 마주 보고 앉아 울 뿐이었다. 한참을 울던 엘리샤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린 죽음을 향해가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종착역이지만,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한 발자국 가까이 그 끝에 다가서는 엘리샤를 붙잡고 싶었다. 되돌릴 수 없다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주길 바랐다.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엘리샤를 헤아리지 못했다.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지인들에게는 민간요법을 요청했다. 잘 알지 못하거나 아예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카톡과 문자,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없는 에너지를 끌어올려 부모와도 싸워야 했다. 여전히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했고, 여전히 말은 날카로웠다. 서운함이 들면 또 한참 동안 발길을 끊었다. 그럴 때면 엘리샤는 힘들어했고 상태 악화로 이어졌다. 불안한 엄마를 지켜오던 리암이 보다 못해 "제발 우리 엄마 좀 내버려 두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복수가 차올랐다. 누워서도 옆으로 돌아서도 잠을 자기 힘든 날이 이어졌고 숨을 눌러왔다. 복수만 빼내면 살 것 같다던 엘리샤는 복수를 빼내자 또다시 부풀어 오르는 다리 통증에 더 괴로워했다. 복수 찼을 때가 행복했다고 말한다. 건강했던 자신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통증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다. 초침이 움직일수록 통증은 커져갔고 내일이면 더해질 고통에 내일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엘리샤는 점점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응급상황이 잦아졌고 드물어지던 외출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힘들어도 그날이 가기 전에 꼭 답장을 해주고 놓친 전화를 다시 해주는 엘리샤. 하루가 지났는데도 카톡확인을 하지 않는 날이 왔다. 신호만 갈 뿐 전화에도 대답이 없다.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밤이 7년 같았다. 초조함에 휩싸인 채 몸이 떨려왔고 잠이 오지 않았다. 어렴풋이 날이 밝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타운하우스 건물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가 공원을 감싸고 있고 작은 아치를 만들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에서 떨어진 여름 햇살이 벤치를 비추고 있다. 뒤로 낮은 계단이 보이는 그 벤치에 엘리샤가 앉아있다. 긴 생머리에 하늘색 옷을 입은 엘리샤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미소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슬픈 눈이 보인다. 할 말이 가득 담겨있는 슬픈 눈을 하고 엘리샤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들었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꿈같지 않았다.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몸을 벌떡 일으키고 핸드폰을 집었다. 카톡 아이콘이 떠있었다. 서둘러 열어보니, 리암이었다.


- 엄마가 어제 천국 가셨어요. 금요일 성당에서 장례식이 있는데 혹시 시간 내서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샤의 작별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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