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미약한 우리의 존재
흐억
미치도록 등이 가려웠던 엘리샤에게 평생 처음 겪는 극심한 가슴 통증이 덮쳤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수 같은 비명을 뱉어낼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통증이 사그라들지 않자 패밀리 닥터(가족을 전담하는 주치의)의 지시대로 응급실에서 심장 검사를 하고 진통제를 맞았다. 검사 결과 심장은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이 없다고 넘기기엔 일반적이지 않았던 가슴 통증이 석연치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다리가 부어올랐다. 군살이라고는 없는 가느다란 몸에 두 다리는 코끼리의 것처럼 굵어져 갔다. 패밀리 닥터는 신장 검사를 실시했고 신장에서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등은 여전히 가려웠다. 몸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던 엘리샤는 노랗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전등이 다해가나 욕실 천장을 올려다보고 거울을 닦아냈다. 그래도 여전했다. 눈도 얼굴도 몸도 노랗게 변해 있었다. 황달이 나타난 후에야 다급해진 패밀리 닥터는 엘리샤를 다시 응급실로 보냈고 영상에서 이상소견이 나왔다. 추가검사를 위해 간이침대 하나 배정되지 않은 추운 응급실 바닥에서 홀로 두려움과 싸우며 밤을 새웠다. 며칠 뒤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생검 조직을 떼내면서 막혀있는 담즙을 빼내기 위한 배액관 시술이 함께 진행됐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패밀리 닥터가 엘리샤 부모님 집을 찾아왔다.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패밀리 닥터는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검사가 반복되고 시간이 지체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응급실에서 받은 검사는 응급실 의사에게서 직접 결과를 들어야 하는 원칙상 진단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불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방문이었다.
계속해서 퉁퉁 부어오르는 다리와 심해지는 통증에 혈액검사를 했고 혈전으로 인한 폐색전증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CT 촬영을 위해 또다시 응급실로 향하며 엘리샤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혈전이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췌장에 있는 게 암이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했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두 다리와 달리 나의 생각은 하루종일 허공을 떠돌아다녔다. 암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엘리샤의 바람에 "네가 암일리가 없지" 하면서도 제발 암이 아니길, 하며 빌고 있었다. 병원을 나왔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나도 선뜻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만 손에 쥐고 만지작 거리다 저녁에야 어렵게 문자를 보냈다. 한 시간 만에 답장이 왔다.
- 혈전은 아니고 암 이래
그날은 엘리샤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서던 엘리샤는 유리문 밖에 서성이며 기다리던 아버지를 본 순간, 나오려던 눈물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못해 살갑지 않던 첫째 딸이었어도, 지난 몇 년간 달아나려 발버둥을 칠 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모였어도, 생일 선물로 자신의 암진단은 너무 큰 불효였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평소처럼 웃었고, 자신은 잘 이겨낼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185 센티미터의 리암은 그날밤, 엄마 손을 잡고 처음 캐나다에 오던 그날처럼 여섯 살 아이가 되어 울부짖었다. 북적이는 낯선 공항에서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밤새 엄마를 부르며 헤매었다.
엘리샤가 암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운동을 쉰 적이 없다. 평일에는 짐에서 운동을 하고 주말이면 리암과 함께 승마를 했다. 나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게에서 일했던 2년의 시간이 필름처럼 흘러갔다. 영상이 선명해질수록 독버섯 같은 그들의 말이 또다시 내 몸에 번져나가고 심장을 옥죄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에게도 여전히 이렇게 아픈 말들이 점차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위협적인 무기가 되어 엘리샤의 가슴을 찌른 것일까. 도대체 엘리샤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자는 부모님의 권유를 엘리샤는 완강히 거부했다. 췌장암 4기. 의지를 다진다 해도 이미 전이가 되었고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투명한 희망을 좇기 위해 리암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두 명의 췌장암 전문의를 소개받은 엘리샤는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밴쿠버 병원에 있는 의사보다 거리가 가까운 써리 메모리얼 병원의 의사를 선택했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병원으로의 신속한 이동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다. 전문의에게 검사결과와 소견서가 전해졌고 두 달 뒤로 첫 대면진료가 잡혔다. 코로나로 인해 이 과정을 하나하나 넘어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엘리샤는 저명한 의사와 연결이 되어 다행이고 응급실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프리패스 카드가 나왔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초조함을 떨칠 수는 없었다. 진단을 받기까지 이미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이 두 달은 오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진단을 받고 엘리샤는 가장 먼저 리암에게 운전을 가르쳤다. 도로시험을 보기 전 최소 일 년간의 교습을 거쳐야 하는데, 이 Learner 기간에는 면허증이 있는 동승자가 있어야만 운전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해 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그 역할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운전을 가르치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타박을 하고선 뒤돌아서서 미안해했다. "얘는 운전에 소질이 없나? 남자애 같지 않고 겁이 많아"라고 했지만, "그렇게 약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야"라는 걱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리암의 운전을 지켜보러 함께 외출한 엘리샤를 딤섬집에서 만났다. 혈색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끝까지 먹는 우리는 주문한 음식들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음식이 거의 비워질 때쯤 엘리샤가 장애소득지원에 대해 물어왔다. 암 진단을 받으면 장애지원 요건이 되는데, 수입과 자산 상태도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부유한 부모가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지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천운이 내린 자산가는 옛말이었는지 엘리샤는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가게를 물려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을 살 때 내어준 돈은 일을 할 수 없게 된 엘리샤를 대신해 리암이 파트타임 시간을 늘려 일하며 갚고 있었다. 정부가 코로나 긴급지원금 혜택 기간이 끝나면 실업급여로 연장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줬지만 엘리샤는 실업급여도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폐쇄되기 전까지 가게에서 일한 4년 동안 부모님이 엘리샤의 실업급여를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려던 엘리샤는 그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날 급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클라이언트 상대를 하지만 인테이크(intake)는 복잡한 절차여서 부분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코로나로 팀원 모두가 재택을 하는 가운데 매일같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인테이크 슈퍼바이저를 찾아갔다. 친구의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신청방법과 이외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분은 병원을 통해 할 수 있는 Hospital Intake 절차를 알려줬고, 팔리아티브 케어(Palliative Care)에 대해 설명해 줬다. 내용을 들으며 한없이 고개가 떨궈졌다. 팔리아티브 케어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한 혜택이었다. 암 4기는 그랬다. 죽음과 연결되는 단어였고, 삶의 끝에 가까이 있다는 상징이었다. 자산 정리, 유언장 작성, 유언 집행자를 지정하는 절차도 알려줬다. 캐나다 법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해주는 조언이었다. 난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어디까지 전달해야 할지 몰랐다.
인테이크(intake):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온 당사자에게 사회복지사가 그들이 필요한 도움이 무엇이며, 기관의 기능으로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 (출처: 현장사회복지용어사전)
엘리샤는 내가 알려준 대로 병원에서 소설 워커(Social Worker, 사회복지사)를 만났고, 다음날 신청서가 우리 쪽에 들어왔다. 일반 신청과 달리 병원 인테이크는 전담팀이 따로 있고 검토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문제는 엘리샤가 우리 쪽 양식을 받아서 작성을 하고 증빙서류와 함께 제출을 해야 하는데 오피스에 와서 긴 줄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행정지원을 도맡아 해 주며 친하게 지내던 CIS(커뮤니티에 파견되어 직접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팀) 직원에게 이번에는 내가 도움을 요청했다. 직원이 신속히 양식과 제출서류 목록을 준비해 줬다.
하루 휴가를 내고 엘리샤의 집으로 향했다. 좋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한 햇살이 야속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것에 눈앞이 자꾸 흐려왔다.
엘리샤와 만나 우선 비씨주 온라인 통합서비스용 계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피스에 방문하지 않고도 우리를 컨택할 수 있도록 계정 연결을 신청했다. 이어 우리 쪽 양식을 설명해 주며 작성이 필요한 곳들을 채워나갔다. 엘리샤가 직접 우리와 연락하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리암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동의서도 작성을 해두었다. 의사가 작성해줘야 할 부분은 별도로 표기해 패밀리 닥터에게 보냈다.
캐나다에 와서 일을 하며 10년 넘게 연금을 납부해 왔기 때문에 연방 장애지원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됐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연방 신청서까지 준비를 했다.
제출해야 할 은행 서류는 리암이 준비를 해주었다. 남은 서류는 시청에 직접 가야 했다. 날씨가 좋으니 엘리샤가 걷고 싶어 해 우린 모두 시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푸른 잎과 꽃봉오리가 어우러져있고 서늘한 바람에서 봄이 느껴졌다. 평범하던 봄풍경이, 늘 걷던 거리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패밀리 닥터가 작성한 서류가 접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지원 승인이 났다. 케이스가 열렸고 엘리샤는 나의 클라이언트가 되었다. 시스템에 떠 있는 이름,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케이스에 담겨있는 내용들까지 친숙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서글픔이 밀려왔다. 미약한 나는 하늘의 큰 뜻을 알 수 없었다. 나의 고용주였던 엘리샤의 부모님. 그들에게 상처를 받고 나는 한국인과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공무원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 대상이 엘리샤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